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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n 04. 2022

친구의 삐삐

<잊었던 용기>를 읽고



 중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딱 지금 계절쯤이었던 것 같다. 아주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한동안 꽤 자주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었다. 친구네 집은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그린벨트 지역에 있었던 것, 대구시내이면서도 시골 느낌이 나는 길에서 한참 버스를 기다렸던 것, 텔레비전으로 같이 웨딩피치를 본 것, 친구가 간식으로 치즈를 주던 것 같은 게 기억난다. 친구의 이름은 지혜? 혹은 은혜? 였었는데 오늘 일기에서는 은혜로 부르기로 하자.


 아무튼 하교 후에 은혜네 집에서 잠깐 놀고 다시 같이 버스를 타고 학원에도 갔다. 아, 수학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나 보다. 그 시기에 은혜는 유행하는 삐삐를 가지게 되어 나에게도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삐삐가 없어서 친구들에게 전화번호나 음성메시지를 남기면 친구들이 다시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어느 날 저녁에 나는 은혜에게 삐삐를 쳤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은혜네 집에 갔다가 둘이 같이 학원에 지각을 했던지, 그것 때문에 학원 선생님에게 혼이 났던지 그랬을 것이다. 그 문제로 살짝 신경전이 있었던가? '네가 따라온다고 했잖아.' '네가 같이 가자고 해서 늦었잖아.' 이런 식이었지 싶다. 두 번 정도 호출을 했는데도 은혜가 연락을 해주지 않아 나는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사과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남긴 후에도 은혜에게서 연락이 없자 나는 얼굴이 벌게지고 심장이 쿵쾅대면서 눈물까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반응인데, 그걸 알면서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은혜는 나를 정말 싫어하나 봐.' '은혜는 나를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겠지.' 생각이 이렇게까지 뻗어나가서 눈물 콧물을 흘려가며 몇 번이나 삐삐 호출을 하고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좀 이따가는 보다 못한 엄마가 아주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나를 달래주기도 했다.
"엄마 생각에는 울지 않고 차분하게 내일 친구를 만나서 말하면 될 것 같아."
나는 그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까지 생겨 엉엉 울다가 잠들었다.


 다음날 학교에서 은혜를 마주쳤을 때 엄청 용기를 내서 인사를 건넸더니 은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갑게 구는 게 아닌가? 그래서 또 한 번 용기를 내서 내가 남긴 음성메시지를 들었냐고 물어봤더니 은혜는 깔깔 웃으면서 말했다.
"나 삐삐 음성 들을 줄 몰라~ 들어온 거 확인도 안 했어~"


 허무함과 동시에 밀려드는 안도감. 머쓱하고 부끄러운 마음. 온갖 감정들을 뒤로하고 눈물 나던 지난밤을 잊기로 했다. 그 후로도 은혜와는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더 친해지지도 않은 채, 적당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늘 친구 관계로 힘겨워하던 나의 어린 시절, 내 성격이 제일 잘 드러나는 에피소드로 스스로에게 각인된 이야기이다. 관계는 혼자 맺는 것이 아닌데 나는 혼자서 먼저 엉엉 울어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궁금한데, 은혜는 그 후에라도 나의 음성메시지를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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