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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n 27. 2022

나란히 걸으려면 먼저

사랑꾼은 뒤로 가기


  그 옛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하던 광고 카피가 오래도록 유행할 때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남자들이란 그저 사소한 거라도 칭찬해주면서 살살 구슬려야 한다'따위 도저히 아니꼬워서 못 하겠다. 나는 본래 칭찬에는 박한 편이고, 거짓으로 칭찬을 말하면 허접한 A.I처럼 뚝딱대는 말투가 튀어나오니 제아무리 눈치 없는 남편이라도 알아챌 것이다. (혹시 진짜 속는 거 아닐까? 아니야. 그래도 나는 진실하게 살겠어)

 남편과의 일화를 이것저것 써보다가 그만뒀다. 우리의 대화는 뭐랄까, 아주 좋게 표현하자면 빨간 머리 앤과 매슈 아저씨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한쪽은 재잘대고 한쪽은 들으니까.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듣는 남편의 눈매가 곡선을 그리며 부드러워지는 상황은 거의 없다. 내가 둘이 카페라도 가자고 하면 남편은 그저 심드렁해진다. 외식이라도 하면 같이 시간을 '보내 주는' 생색은 얼마나 내는지, 남편 앞에서 나는 게으른 주인이 키우는 힘없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권유와 애원 사이, 딱 기분이 나빠지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데이트는 한숨과 짜증으로 급히 마무리되곤 한다.
 이런 문장들을 쓰고 나면 진정으로 우리 부부가 문제점만을 안고 살아가는 듯 느껴진다. 그 느낌 뒤에는 필연적으로 슬픔이나 분노가 뒤따르고 끝내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고, 나는 그렇게는 못 살겠다!

 내가 한때 품었던 가정적이고 여성스러운 아내가 되고자 했던 마음처럼, 나를 무한히 존중하며 내 말을 머슴처럼 따르는 남편이라는 이상향은 환상이었다. 남편을 향한 회오리바람 같은 감정의 조각들은 결국 나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다. 나를 더 사랑해줘. 나에게 더 관심을 가져줘. 나를 봐줘. 그러니 내 모든 행동은 남편을 의식한 부자연스러운 모양일 수밖에 없었다. 깨달음보다는 체념으로부터 결심할 수 있었다. 생긴 대로 살자. 남편이 일관적으로 자기 개성인 무관심과 무뚝뚝함을 지켜나가는데 나라고 나를 꾸며낼 필요가 있겠는가? 나도 본래 내가 자연스러운 모습대로 지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각자의 모습을 존중하는 부부가 되었다.라고 쓰고 싶지만, 아직 거짓말이다. 그저 막연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더 다정한 날도 오겠거니 하고 산다. 각자 걷지만, 함께 사는 우리가 나란히 걸으려면 일단 좀 떨어져야 한다. 부둥켜안거나 심지어 업고 가려는 욕심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졌으니까. 내가 혼자서 똑바로 걸어야 누군가와 나란히 걸을 수도 있다. 그래야 내가 결혼 생활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나대로 괜찮아야 관계도 괜찮은 거니까. 다 알잖아. 혼자 잘 있는 사람이 괜찮은 커플이 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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