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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an 05. 2023

살림과 집안일

교과 과목으로 배웠어야!

1월 3일 화요일


국정교과서가 필요한 과목 ㅡ 살림과 집안일


많은 가정이 그러하듯, 우리 집도 엄마(며느리, 아내)의 노동력 착취로 살림이 꾸려졌다. 농사, 회사, 가사로 가득 채워진 생활은 그 자체로 고행. 엄마는 여전히 제 먹을거리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남편의 밥을 차리고, 세탁기 작동법을 모르는 남편의 옷을 빨며 살고 있다.


결혼한 지 8년,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 자취를 오래 했다면서도 집안일은 아예 손 놓고 사는 남편에게 분노와 체념을 반복하면서 혼자 열심히 살림을 하고 있다. 요즘은 이런저런 표현은 다 귀찮고 집안일 하나 못하는 성인 남성들이 "인간구실을 못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남자들이 특별히 더 게으르거나 거지 같은 가부장제를 배워서이기도 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의 부재.


나는 어릴 적부터 공부만 하면 된다고 잘못 배워서, 여동생이 살림을 다 해줘서 살림살이를 잘 몰랐다. (물론 설거지나 밥 하는 법을 모를 정도로 모지리는 아니었고, 청소는 잘했다) 그래서 결혼 후에 요리와 설거지, 청소와 빨래가 모두 내 몫이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전업주부란 이런 건가? 진짜 보람이 하나도 없네?


출근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집안일이 내 일이고, 내가 출근을 해도 노동 시간이 짧다는 이유로 당연히 살림은 내 몫이었다. 그렇게 당연히 내 일이 된 살림은 남편이 할 이유가 없어진 듯, 온전히 내 일이다. 거기에 육아까지 더해졌으니, 내 어찌 평온한 마음으로 쓸고 닦고 밥을 하랴? 이제는 배달 음식도 지긋지긋하여 집밥을 먹기로 결심한 새해, 오늘은 미역국 한 끼, 라볶이로 한 끼를 때우는데도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모르겠다.  라볶이에 들어간 고추장이 청양인지(오랜만에 고추장을 썼더니 어느 통이 매운지 알 수가 있나) 맵다고 아주 난리다. 그러니 내 어찌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를 하겠느냔 말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밥 해 먹으라는 소리를 남편이나 아빠에게 해봤자 그저 가정불화를 일으키는 신호탄일 뿐 소용이 없다.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국영수사과와 함께 "살림과 집안일"을 가르쳐야 한다. 집안일은 누가 거저 해주는 일이 아니라는 개념부터 실전 방법과 예시까지 가르치고 실기시험으로 수행평가도 해야 한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면 빨래는 물론 정리와 청소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중학생이면 제 밥은 거뜬히 해 먹을 수 있다. 집안일을 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학업보다 더 중요하다.(그리고 어차피 집안일할 시간에 공부도 안 한다)


본인이 하지 않는 일을 업수여기기는 쉽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매사 도움 안 되는 훈수만 둔다. 그런 존재들을 끝없이 키워내서 무얼 하겠는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살림과 집안일"을 교육 과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자, 첫 단원은 "밥 먹기와 치우기"부터다.

마음에 들었던 카페 보움



1월 4일 수요일


살림과 집안일 ㅡ 설거지


영화 "전우치"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스승님은 여기까지 보셨구나." 만큼.

스승님ㅡ밥을 먹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전우치ㅡ(툇마루에 드러누워) 소화를 시켜야지요.

스승님ㅡ이놈아, 밥을 먹은 다음에는 그릇을 씻어야지.

이때 스승님이 뭔가를 던져서 전우치의 뒤통수를 때렸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우치는 구시렁거리면서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는 왜 이리 귀찮은가? 김영민 작가님은 "설거지는 조금 미루면 귀찮지만 많이 쌓이면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세상 아무리 아름다운 꽃미남이라도 밥 차린 사람이 설거지할 때 가만히 앉아서 팔만대장경이나 쓰고 있으면 꼴 보기 싫다고도 했다.(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저런 내용이었다.)


설거지는 유난히 더 별로다. 청소나 빨래는 한 번 해놓으면 적어도 하루 이틀은 가는데 설거지는 말 그대로 돌아서면 쌓인다. 요리를 하면서도 설거지가 나오고 밥을 먹고 나서도 나온다. 일거리가 쌓이는 게 눈에 보인다. 요리를 하면서 이미 지친 상태로 밥을 먹었는데, 같이 밥을 먹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 할 일을 하러 가버리면 화가 난다. 쓰다 보니 알겠다. 내가 남편과 겸상하는 걸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이거라는 걸.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양치질을 해야 하는 것처럼 밥을 먹은 후에는 설거지를 해야 한다. 밥을 차리는 사람과 밥상을 치우는 사람이 역할 분담을 잘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적어도 밥상 정리라도 해야 한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기본이다. 설거지거리를 개수대에 넣고 반찬통을 정리하고 식탁과 바닥을 깨끗하게 닦는 정도도 못하면, 밥을 먹지 말자.


나 혼자 먹은 밥상을 치우는 것도 귀찮다. 오늘은 밖에서 아이와 저녁을 먹고 들어왔는데 개수대에는 점심때 김치수제비 먹었던 사발이 있었다. 아까 귀찮았던 걸 미루었더니 내 몫의 설거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릇 하나, 숟가락 하나라 금세 끝났다.


밥을 차려 먹고 그릇을 씻는 단순하고도 필수적인 일, 이게 왜 이리 힘들까?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오래전부터 '그깟 집안일 따위'라는 버르장머리 없는 개념이 애국가 가사처럼 각인되어서겠지. 안타깝고 애통하다. 집안일을 대하는 바른 태도를 배우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남편의 삶이.


김영민 ㅡ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1월 5일 목요일


살림과 집안일 ㅡ 반찬투정


아는 언니가 반찬 투정을 하는 남편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싱크대에 반찬을 그대로 다 갖다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는 해야 입을 꾹 다문다는 언니의 말에 놀랐었는데, 역시 한 치 앞을 모르는 어리석음이었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말하던 남편은 신혼 때 음식 투정이 정말 심했다. 싱크대에 반찬을 버리고 싶은 정도가 아니고 남편의 얼굴을 찌개 그릇에 박아버리고 싶었다. 무얼 먹든 매번 입을 떼서 싸울 때 나는 소리쳤다.

"니가 무슨 한식 대첩 심사위원이야?! 내가 너한테 숙제 검사를 받아야 해?"

돈을 받고 고용된 개인 요리사라도  열받을 만한, 신경질이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말도 안 하면 다음에 또 같은 걸 주잖아. 그러니까 말해야지."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지?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싫다는 메뉴는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았다. 된장찌개는 어머님이 끓여서 냉동해 주신 것만 주었다.   그랬더니 당연한 결과로 배달 음식을 많이 먹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나서 반찬 투정이 줄어들긴 했지만(본인도 그게 나쁜 버릇인 걸 알던데 어찌 그리 못 고치는지) 여전히 입맛이 맞지 않는다. 아, 또 화가 난다. 그런데 왜 자꾸 이걸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어쨌든, 건강과 식비 절감을 위해서 배달 음식은 줄이기로 결심했는데 남편이 내 음식을 평가하면 홧김에 배민 앱을 켜버릴 것 같다. 그래서 그전에 글이라도 쓰면서 나를 좀 달래 보려는 건데, 쓰면서도 얼굴이 벌게지니 좀 쉬어야겠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에서는 4형제의 막내인 원빈이 식사 담당이다. 막내는 지독히도 솜씨가 없는데도 엄청 성실하게 요리를 한다. 저녁 밥상에서 형들이 한 마디씩 한다.

ㅡ야, 뭔가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만들어진 반찬을 그냥 사 와.

ㅡ야, 맛이 이게 뭐냐?

ㅡ야! 맛없으면 먹지를 마! 나처럼.

결국 막내는 동네 여자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반찬을 얻어먹기로 한다.


나는 "맛없으면 먹지를 마, 나처럼"을 좋아한다. 웃으라고 만든 대사이긴 하지만, 밥상을 얻어먹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하는 말이다. 물론 최고의 식객은 주는 대로 맛있게 잘 먹고, 입에 맞지 않아도 기분 좋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겠지만 쉽지 않다.ㅡ 아, 밥 먹는 태도에 관해서는 아빠를 칭찬하고 싶다. 아빠는 주는 대로 잘 먹고 이렇게 말한다. "음식이 짜면 밥을 더 먹고, 싱거우면 반찬을 더 먹으면 된다."ㅡ


식도락은 즐겁다. 하지만 매 끼니를 다 맛있게만 먹을 수 있나? 그냥 때우는 식사도 있고 대충 먹는 밥도 있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밥은 제가 챙겨 먹고 누가 차려주면 맨 밥에 간장이라도 그저 고맙게 여겨야 한다. 그릇에 밥 푸고 김치 꺼내는 것도 귀찮아하는 나 대신 수고해주는 사람에게 투정이라니, 가당치 않다. 회사 급식이 싫다는 남편이 부럽다. 나도 급식을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께 끓인 미역국이 많이 남아 있어서 오늘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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