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초록

내 이름은 눈그린

by 원효서


40대가 가까워지자 친구들이 꽃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 자신이 민망하고 낯선지 인스타에 꽃이나 화분 사진을 올릴 때 꼭 한마디 덧붙였다. ‘원래 꽃 안 찍는데, 이제 나이 들었나 봐.’ 나는 휴대전화에 카메라 기능이 생겼을 때부터 꽃 사진을 찍었다. 오래된 나의 블로그에는 ‘매직홀’ 핸드폰으로 찍은 복사꽃, 라일락, 장미 사진이 남아있다. 스마트폰 갤러리에도 꽃과 나무, 하늘과 풍경 사진이 가득하다.


꽃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따뜻한 날이 좋다. 가로수에 연둣빛 잎이 돋아나서 단풍이 지기 전까지 고개를 들면 바라볼 풍경이 많다. 초록의 계절은 길가의 벤치 아무 데나 앉아 음악을 듣고 시간을 보내도 괜찮을 때이다. 벚꽃이 지는 4월부터 국화가 피는 10월까지, 경상도의 낮은 따끈따끈하다. 한 겹 옷만 입고 지낼 수 있는 동안이라면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얇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운동화 차림으로 온 동네를 걸어 다닐 수 있다면 8시까지 해가 지지 않는 한여름도 좋아한다. 에어컨 바람에 식은 몸이 뜨거운 해를 만나 녹으면 긴장이 풀려 노곤해진다. 장마와 불볕더위, 모기와 땀은 견디기 힘들지만 그래도 여름을 좋아한다.

이런 날! 이런 순간!

쉽게 거칠어지는 마음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 가벼운 옷차림을 더 찾는지도 모른다. 사계절이 뚜렷해서 필요한 옷 종류가 많은 땅이 불만이다. 옷장 정리는 귀찮고 그 귀찮음을 무릅쓴 정리 끝에 입을 옷이 없는 새 계절을 만나는 심정이 허탈하다. 겨울옷은 어찌 그리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지, 코트는 무겁고 패딩은 차갑고 기모는 두껍다. 추위를 피해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몸과 마음이 오그라든다.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겨울은 버티는 계절이다. 가로수가 앙상하고 하늘이 뿌연 날이면 쉽게 울적해지고 추운 기억에 빠져든다.


공허하고 외로웠던 고3 시절의 겨울, 항상 추운 집의 결로와 곰팡이, 갈 곳 없이 헤매던 20대의 몸과 마음, 낯선 도시에 떨어진 9년 전의 막막한 12월, 6개월 아기와 단둘이 어찌할 바를 모르던 5년 전의 오늘. 다행히 내 마음은 추운 계절을 지나왔고, 그러니까 이런 겨울의 나쁜 기억들이 지금의 내 마음마저 흔드는 일은 잘 없다. 그저 차가운 공기와 긴 밤이 춥고 쓸쓸한 감각에 버무려진 채 나의 겨울 이미지로 굳어졌을 뿐, 겨울에 온기를 느끼는 법도 배워가고 있다. 한해의 반은 좋아하는 계절이고 나머지 반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쓰고 보니 1년 내내 괜찮은 날이라 놀랍다.


지금 이 한겨울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초록의 계절이 가장 좋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눈그린(noon green)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나의 이름이다. 좋아하는 시간인 정오와 사랑하는 색인 초록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이름을 보면 초록의 계절이 떠오른다. 눈이 부시게 맑은 하늘 아래 초록의 이파리들이 가득한 날들, 고개를 젖혀 머리 위를 자주 올려다보면 사진첩에도 초록과 파랑이 가득해진다. 지금의 날을 즐기지 못하고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지만, 그래도 역시 봄이 기다려진다. 가지 끝에서 뾰족하게 솟아나는 맑은 연두색 새잎이 사랑스러운 4월의 나무를 보고 싶다.

나무의 4월!


#기대어씁니다6기

#나의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