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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13. 2023

버스를 타면

버스에서 떠올리는 기억들


가끔 풍경으로 지나치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걱정을 하는지, 어떤 생각에 빠져 길을 걷고 있는지 붙잡고 물어보고 싶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부터 곧잘 느낀 기분이다. 특히 타고 있는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있을 때, 바쁜 듯 길을 건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느긋하게 움직이거나 딴생각에 빠져서 초록불을 놓치는 사람을 발견하면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 어디 가요? 무슨 생각해요?"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는 사람도 많지 않은 길을 달릴 때 먼 산을 보다가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이 반갑다. 자전거나 전동킥보드를 타고 외진 곳에 있는 학교로 가는 대학생들이 귀엽다. '탈 것들이 위험하니 다들 무사히 다니렴.' 하고 안전을 빌어준다.


방금 버스 정류장 옆 횡단보도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그저 해바라기 하며 바람 쐬러 나와 앉아계신 것인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공상을 이어가려는데 버스가 움직였다. 자주색 조끼를 입고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앉아있던 할머니, 내가 의자를 본 게 맞나? 그저 큰길을 건너기 전에 잠시 쭈그려 앉아 계신걸 잘못 본 걸까?

며칠 전 갔던 카페

20대에는 버스 정류장에서 전도하는 종교인들을 만난 경험이 많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그저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면  성경책을 펼쳐 내 눈앞에 들이대며 읽어달라 부탁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당황도 잠깐 버스가 금방 와서 피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까맣고 단정한 복장과 형광펜 밑줄이 가득하던 성경책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 번은 밤 10시쯤 퇴근길에 체구가 작은 아주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일을 하느라 지쳐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내쪽으로 다가와 바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아가씨 나이 때는 너무나 힘들고 우울했어요.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정말 좋아졌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우울해 보이나 싶어 기분이 상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일 우울한 것도 사실이었다. 건네주는 명함종이에 쓰인 교회 이름이 제법 규모가 있고 평범한(사이비는 아닌 듯) 느낌이라, 일단 받아 들고 버스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분이 먼저 버스를 타려고 움직이는데 하필이면 내가 기다리던 버스였다. 다음 버스까지 기다리기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어쩔 수 없이 버스에 올랐는데, 서있을 자리도 많지 않아 바로 근처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분은 다시 한번 아까처럼 말했다. "내가 아가씨를 보니 정말 예전 나 같아서 그래요. 꼭 나와보세요. 정말 좋아요."

부끄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했는데, 표정이 너무 간곡해 보여 마냥 외면하기도 힘들 때쯤 다행히 우리 집 앞에 버스가 섰다. '내가 그렇게 울상인가?'와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가 섞인 기분이 괜찮을 리는 없었다. 아주 가끔 버스를 타고 그 교회를 지나치면 작고 마른 체구에 수수한 스타일의 짧은 머리 아주머니의 표정이 떠올랐다.


서른쯤 되었을 때는 좀 더 재미있는 어른을 마주친 적이 있다. 평소 잘 가지 않던 교대 부근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저녁이었다. 왜 그 동네에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는 바람이 선선하니 상쾌한 저녁이었다. 나는 차가 가득한 도로를 멍하니 보며 서 있었다. '버스는 언제 오려나, 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나...' 하나마나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흰머리에 점잖은 인상을 한 어른이 옆으로 다가와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교대 학생인가?" 하기에 "아니요" 하고 시선을 돌렸는데 그 어른이 다시 옆으로 한 발짝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자네는... 그러면... 문학을 하는가?"

처음 보는 사람이 건네는 낯선 질문. 나는 "네?"하고 웃어버렸다. 문학을 하는가? 내가? 저 어른은 뭔가 선생님인가? 나의 어딘가가 문학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일까? 술 드셨나? 멋쩍은 시간이 길어지려는 참에 내가 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나는 때때로 떠올렸다. "자네는 문학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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