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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Aug 16. 2024

아버지의 암투병기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18)

(사진 - 네이버 블로그 '데스모크' 펌)


엄니가 대장암 판정을 받고도 적극적인 치료를 포기하고 '암과 함께' 남은 여생을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전에 후두암에 걸려 암투병을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 역시 2016년 목에 후두암이 발견되어 약 3년간의 수술과 치료를 받으시다 결국은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삶을 마감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화에서는 아버지의 암 투병기를 써 보려고 한다.


2015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무렵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건강엔 자신이 있다며 병원이라곤 잘 가시지 않던 아버지가 목이 이상하다며 대학병원에 다녀오시더니 얼굴이 어두워지셨다. 우리가 자세히 물어보니 목이 따갑고 침도 잘 안 삼켜져서 목감기인 줄로만 알고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는데 거기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부산의 B 대학병원에 갔는데 조직검사를 하자고 해서 목에서 살점을 조금 떼어내서 세포를 검사하는 조직검사를 하고 돌아왔는데 며칠 후 결과를 들어보니 후두암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임파선까지 번진 걸로 봐서 3~4기라고 판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니 의사 왈 수술을 해서 암이 생긴 목의 후두 부분을 다 들어내야 하고 (그걸 의학용어로 전절제술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성대도 같이 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잃어버릴 수 있지만 대신에 기계를 이용해서 인공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단다. 그런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기계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평생 큰 목소리로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목소리 없는 삶은 이미 의미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살리면서 후두암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병원을 찾았다. 바로 서울에 있는 빅 5중의  하나인 S병원이었다. KTX를 타고 아버지를 모시고 그 병원에 있는 이비인후과 교수님을 만나자 그는 아버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로봇 수술로 최소한의 절제를 하기 때문에 성대를 보존하면서 후두암이 생긴 부분만 떼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목소리를 보존하면서 후두암을 치료할 수 있는 거죠."


아버지와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수술만 성공적으로 끝나면 목소리도 보존하면서 후두암을 완치할 수 있다니... 역시 서울이구나, 이래서 암에 걸리면 다들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 가라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거구나... 우리는 그렇게 서울을 믿었고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을 믿었고 그 대형병원의 로봇수술  전문의라는 이비인후과 교수님을 믿었다.


그런데 수술하는 날, 수술시간은 예상과는 달리 길어졌다. 오전 8시쯤에 수술방에 들어가 정오가 되기 전에 끝난다고 했는데 수술시간이 길어져 오후 5시가 돼서도 아버지는 수술방을 나오시지 못했다. 나는 수술방 앞에서 무사히 수술이 끝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지만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이 돼서야  수술방에서 나오신 아버지의 목에는 위의 사진에서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의사는 일단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절개를 해 보니 예상외로(?) 암이 퍼진 부위는 넓었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성대는 절제하지 않았고 목에 뚫린 구멍으로 흡인기를 통해서 계속 흡인(suction-가래나 침 따위를 빨아올리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아버지는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계속 치료를 받으면 다시 목에 뚫린 구멍도 메워지고 목소리도 나올 거라는 의사 말에 힘을 내시라고 위로를 드렸다.


한 6개월 정도는 의사 말대로 아버지는 점점 회복되시는 듯 보였다. 한 달 정도의 입원 기간을 거쳐 방사선 치료를 받을 때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통원 치료를 했었다. 엄니가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에 있으면서 병원을 왔다 갔다 했었다. 그리고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매주 항암치료를 할 때는 내가 비번날 아버지를 서울에 모셔다 드리면서 치료를 받았다. 계속 올라오는 가래와 침을 계속 흡인해야 했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도 기침을 하는 아버지의 침과 가래를 계속 닦아내면서 올라가야 했다. 소방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새벽부터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가는 날은 정말 너무 힘들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의사 선생님 말에 희망을 걸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젊은 시절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니나 나나 누나의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6개월 정도가 흘렀다. 그래서 요즘처럼 덥던 2017년의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평소에 좋아하시던 콩국수 가게에 가서 다시 콩국수 면발을 삼키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모두 얼싸안고 울었다. 아버지가 아직 말씀은 못하시지만 언젠가 다시 목에 뚫어놓은 구멍을 메우고 그 멋진 목소리를 우리 앞에서 다시 낼 수 있으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그 해 가을, 땅에 뒹구는 낙엽처럼 산산 조각나 버렸다. 아버지의 후두암이 폐로 전이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셔서 숨을 쉬지 못하셨고 어느 새벽에 서울로 긴급후송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를 집도했던 이비인후과 의사는 CT와 MRI를 찍어보더니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고 폐암수술을 다시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상태는 벌써 체력이 바닥나 또 한 번의 암수술을 도저히 감당하실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에게 이제 수술은 무리라고 하니 의사는 그럼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며 수술을 받지 않을 거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자신 있게 우리에게 얘기하더니 암이 전이되고 나니 그렇게 돌변할 수가 없었다. 난 그 의사에게 상당한 배신감을 느꼈다. 자기 말만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말하더니...


나는 그제야 암이라는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돌연변이 세포인 암세포는 그 생명력이 대단해서(?) 누군가 자기를 없애서 하면 할수록 더욱 스트레스를 받아 더 많은 곳으로 복제, 전이되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암세포는 그 자체로서 노화와 스트레스에서 발현한 스트레스 세포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메스를 들고 암세포를 도려내는 것으로 치료의 대부분을 삼는 현대 서양의학은 필연적으로 암세포의 전이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셨다. 부산에서 대학병원과 요양병원을 전전하시다가 2018년 여름을 넘기시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오랜 병수발 끝에 신장이 안 좋으셨던 엄니는 결국 신장투석을 받게 되셨다. 엄니가 아버지 간병을 못하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간병인을 쓰게 되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또한 경제적 타격이 만만찮았다.


다시 그 시절을 복기해 보면 처음부터 부산 B대학병원의 말대로 후두 전절제술을 시행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랬다면 아버지는 목소리를 잃으셨겠지만 후두를 다 들어냈기 때문에 전이될 암세포는 없어졌을 테고 그럼 아버지의 후두암도 완치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서울에 가지 않고 부산에서 치료받음으로써 아버지나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고통과 스트레스는 반감되었은 것이고 엄니가 저렇게 신장투석의 거친 길을 가는 상황은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목소리를 살리기 위해 후두를 부분절제 함으로써 거기에 남아있던 암세포들이 폐로 전이를 일으켰고 거기에 손을 쓰지 못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만약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린 것이니 아버지의 운명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게 가족들과 내 정신건강에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아있는 엄니를 생각하면 엄니만큼은 아버지의 전철을 따르게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켜본 아버지의 암투병과정은 우리도 힘들었지만 누구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너무 힘드셨기 때문이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차 안에서 가래를 뱉어내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온몸이 쇠약해지시면서 나중에는 입으로 음식을 못 드시고 콧줄에  의지해 유동식으로 식사를 하실 때에는 말씀은 못하시고 나에게 이런 글을 종이에 써서 당신의 의사를 전하셨다.


"이제 집에 가자, 죽더라도 마지막으로 집에 가 보고 싶구나."


그렇게 내게 종이에 쓰신 글을 보여주시면서 아버지는 평생 내게 보이지 않던 눈물을 보이셨다. 하지만 그 몸으로 퇴원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집으로 가시면 언제 호흡곤란으로 갑자기 숨이 끊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죽더라도 병원에서 죽어야 했다. 그렇게 암환자로서 현대 서양의학을 의지해 대형병원에 발을 들일 때는 결국 그 종착역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완쾌되어 자신의 발로 걸어 나오거나, 아니면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그런 현대의학의 치료의 수레바퀴(수술과 항암, 방사선, 그리고 표적치료제로 이어지는)에 엄니마저 밀어 넣을 자신이 더 이상은 없었다. 그렇게 암세포를 태워 죽이고 약으로 죽이고 메스로 찢어 죽이는 치료는 그 자체로서 원발암은 없앨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그 암의 복제와 전이를 자극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결정한 것이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엄니가 마지막 그날까지 암과 동행하실 수 있도록...  


벌써 다음 주면 아버지의 기일이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큰 목소리로 남자답고 우렁차게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하지만 말년에는 그 목소리를 들으래야 들을 수 없어 너무 안타까웠다. 남아있는 엄니만큼은 암으로 인한 치료로 너무 고통받지 않고 암과 함께 동행하다 당신의 남은 여생을 우리 곁에서 조용히 마무리지을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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