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로 살아간다는 것(22)
(사진 - 티스토리 펌)
요즘은 모든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받으려면 일단 신분증을 제출해야 한다. 내가 어릴 때는 '의료보험증'이란 게 있어 병원에 가면 그것을 보여주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어느 순간 없어지면서 주민번호만 불러주면 되었는데 또다시 코로나 이후로 이런 제도가 점점 정착된 것 같다.
그전에 썼던 글에도 몇 번 언급을 했지만 엄니는 이 '신분증'을 들고 다니다가 몇 번이나 잃어버리셨던 것이다. 울산에 사는 누나네 집에 갔다 오시다가 버스 안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주머니에 넣어놨던 조그마한 지갑을 잃어버리면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기도 했고, 택시 안에서 그것을 떨어뜨려 잃어버리기도 했고, 어디 놔뒀는지 몰라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가 엄니를 모시고 주민센터와 구청과 뛰어다니면서 재발급을 받기도 했고 경찰서에 가서 사건 경위서를 쓰기도 했다. 그 때는 엄니의 주민등록증이 범죄자의 손에 들어가 범죄에 연루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엄니는 그렇게 내가 동분서주하는 걸 보셨는지 어느 순간부터 주민등록증 들고 다니기를 어려워하시는 것이다.
'혹시나 내가 또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다 또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해서 아들이 또 쓸데없는 일로 여기저기 불려 가면 어떡할까?'
'차라리 내가 주민등록증을 들고 다니지 않는 게 낫겠어, 그럼 잃어버릴 일도 없잖아?'
엄니의 머릿속에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엄니의 이런 작전(?)은 어느 순간까진 잘 들어맞았다. 엄니가 신장투석을 하러 다니는 B병원에서 엄니는 이미 유명인사(?)였으니 말이다. 그 병원에서는 아마도 이**할머니로 통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할머니 오늘은 독감 예방접종하는 날이에요."
"이** 할머니 오늘은 아들이 안 왔어요?"
"이** 할머니 오늘 이비인후과 진료가 있으니 투석 후에 2층으로 가세요."
하도 오래, 그리고 징하게(?) 투석을 해와서 그곳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원무과 직원들도 이** 할머니라고 하면 모두가 알아듣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엄니를 보고 신분증을 보여달란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교통사고 이후로 엄니는 나와 함께 J한의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곳의 간호사는 당연히 엄니를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통원치료를 받으러 온 날, 간호사는 엄니에게 당당(?)하게 물었다.
"할머니, 신분증 가지고 오셨어요?"
흠칫 당황한 엄니의 표정에 나는 단번에 엄니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모자의 표정을 보더니 그 간호사도 상황판단이 되었는지
"담부턴 꼭 가져오세요!"
하고 말하고 말았다. 그나마 엄니와 내가 그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입원하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을 익힌 터라 그 정도로 지나갔지, 안 그랬으면 진료를 못 받을 뻔했다. 그래서 나도 엄니에게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엄니, 요새는 신분증이 있어야 병원진료가 돼요, 그러니 담부턴 꼭 신분증 가지고 다니세요!"
그런데 문제는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진단서를 발급받는 날 발생했다. 그 간호사에 따르면 그 진단서를 상대편 보험사에 제출해야 진료비와 치료비가 나오기 때문에 하루라도 늦어지면 그 비용을 우리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역시 간호사는 엄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신분증 가져오셨어요?"
엄니의 얼굴은 다시 굳어버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엄니를 보고 나는 또 엄니가 신분증을 못 챙겨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꼭 오늘까지 진단서를 제출해야 하나요?"
간호사는 컴퓨터를 보며 확인을 하더니 내일까지 제출해도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나마 간호사의 작은 착각에 다행히 해프닝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엄니는 뒷좌석에서 불평을 했다.
"으이구, 그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그전에 얘길 해야지!"
간호사가 그전에 병원에 갔을 때, 얘길 안 해서 신분증을 못 챙겨 왔다는 말이었다.
"엄니, 요즘은 신분증이 없으면 병원에서 아무것도 못해요, 그러니 아예 신분증을 저한테 주세요, 이제부터 제가 가지고 다닐께요!"
나는 이렇게 엄니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으면 분실할까 두렵고, 그렇다고 안 갖고 다니면 병원진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엄니와 항상 동행하는 내가 엄니의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등록증은 병원에 갈 때 외에도 엄니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것은 엄니에게 맡겨두고 나는 엄니의 장애인 복지카드를 내 지갑에 넣고 다니기로 했다. 그러면 엄니 혼자 어디 갈 때나, 나와 함께 갈 때나, 신분증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지참할 수 있으니 그게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언제까지나 엄니의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신분증이 내 지갑 안에서 엄니가 필요할 때 쓰일 수 있기를, 엄니가 가는 곳 어디나 나와 함께 동행할 수 있기를, 그래서 엄니가 언젠가 내 곁을 떠날 때 나도 미련 없이 그 신분증을 놓아줄 수 있기를, 병원을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구름이 피어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바래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