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 살아간다는 것(68)
지난주에는 막둥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있었다. 그 전날이 내 근무날이었는데 막둥이는 내가 늦게 올까 봐 신신당부를 했다.
"아빠, 그날 육아시간 쓰고 일찍 와!, 9시까지 **초등학교 강당으로 와야 돼~"
이 녀석, 육아시간이란 단어를 어떻게 알았는지 육아시간 쓰고 일찍 오란다. 참 엄마 아빠 대화할 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알았다. 시간은 9시까지지만 한 9시 반까지 가면 될 거야"
"안 돼에에에!~ 우리 선생님이 9시까지 꼭 부모님 모시고 오랬단 말이야아~"
그래, 그 나이 때는 선생님이 하늘 같아 보이는 나이때긴 하지, 그럼 엄마 아빠는?
어쨌든 막둥이 말대로 9시까지 거기에 가야 하니까 육아시간 쓰고 일찍 오기로 했다. 그러자 막둥이는
"아빠, 그날 입고 갈 옷 있어? 위에는 하얀 티, 밑에는 편한 바지 입고 오래!"
이 녀석 봐라, 이젠 아빠 코디까지?
"그래, 얼마 전 백화점에서 산 티 있으니까 그거 입고 가면 되겠다."
그때 마눌이 나섰다.
"근데 여보, 그 티 며칠 전에 당신이 미용실 가서 염색하다 염색약이 튀어 얼룩이 좀 든 것 같던데?, 어디 보자~, 그래 여기 얼룩이 졌네~"
"그래도 그 정도면 별 티도 안 나는데 그냥 입고 가면 되겠지..."
난 티를 들고 살펴보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줄이야...
"안돼!, 깨끗한 옷 입고 오랬단 말이야!"
다시 막둥이가 나섰다. 이러다간 조만간 막둥이의 의상 검열(?)을 받게 생겼다.
"한번 삶아보자, 표백제 넣고 삶으면 될 거야."
그래도 마눌이 거들었다. 마눌의 기지로 얼룩이 들었던 내 티는 흰 눈 보다 더 하얘졌다. 다행히 새 티는 안 사도 될 것 같다.
"어때? 막둥아, 이러니 괜찮지?"
난 마눌이 삶아준 흰 티를 들고 막둥이를 안심시켰다.
"그래, 빨리 엄마 아빠랑 운동회 가고 싶다."
이렇게 막둥이가 운동회에 진심일 줄이야,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그럴까? 막둥이는 한 일주일 동안 운동회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 유치원 때는 기억도 안 나고 초등학교 들어가서야 해 봤던 운동회나 소풍은 내게 그다지 감흥이 없었는데, 특히나 일 학년 때는 다음날 그런 행사가 있다고 해도 한 번도 안 해봐서 그저 무덤덤했지 싶은데 요즘 애들은 어찌 이리도 빠른 걸까? 운동회를 기다리다 못해 아빠 퇴근시간이나 옷까지 신경 쓰다니.. 이건 뭐 빠른 정도가 아니라 어릴 적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렇게 대망의(?) 운동회날이 되었다.
첫 종목은 줄다리기였다. 친구들과 힘을 합쳐 영차~ 영차~ 줄을 당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외에도 학부모릴레이 달리기, 장애물 통과, 훌라후프, 등등 많은 게임들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모두 힘을 합쳐 운동회를 무사히 마쳤다. 결과는 청군과 백군 모두 500대 500으로 무승부였다.
운동회를 다 마치고 밖으로 나갈 즈음 막둥이는 배가 고프다며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도 어릴 적 운동회를 마치고 학교 앞 중국집에서 먹던 자장면이 생각났다.
"그래, 운동회 날엔 자장면이지!"
어릴 때 운동회를 마치고 먹던 한 그릇의 자장면, 그 얼마나 값진 호사던가? 그거 한 그릇이면 다른 친구들 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른 단골 중국집으로 향했다. 막둥이는 처음 해 본 운동회가 피곤했는지 자장면을 먹고 오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졌다. 바깥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마눌이 입을 열었다.
"오늘 피곤했나 봐, 자장면을 먹더니 금세 곯아떨어졌네~"
나도 백밀러로 곯아떨이진 막둥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막둥이는 운동회를 하고 자장면을 먹겠지?, 그리고 언니들처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겠지, 그러는 동안 우리 부부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겠지...
그렇게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고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오늘처럼 오는 부슬비를 바라보겠지, 그것이 언제까지일지라도 막둥이의 잠든 모습처럼 평온한 하루하루가 되기를 오는 차속에서 잠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