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얘기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는 썰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음식점에 와서 '빨리빨리' 달라고 너무 외쳐대기 때문에 가장 많이 알고 있다는 썰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이 선진국들을 가장 빨리 따라잡은 이유가 바로 '빨리빨리'문화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거쳐 산업화 시기로 접어들면서 한국이 내세울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가 바로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신속'과 '정확'이었던 것이다 (누가 '배달'의 민족 아니랄까 봐~)
'빨리빨리'를 논하는 데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바로 현대그룹을 창업하신 정주영 회장이다. 그는 60~70년대 경부 고속도로를 놓으면서 '빨리빨리'의 신기원을 보여주었다. 일명 선시공 후정비 (일단 아스팔트를 깔고 거기에 차를 다니게 하면서 나머지 중앙분리대라든가 제반 공사들을 이어가면서 정비함.) 공법으로 고속도로 건설계획 단계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1년이나 단축시킨 공기를 추가로 1년을 더 단축해서 2년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시켰던 것이다.(완공후에도 계속 고속도로 정비 공사를 했다는 건 안 비밀) 하지만 그에 따른 노동자들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는데 공사기간 중 희생된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77명, 비공식적으로는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다음 나무 위키 참조)
(경부 고속도로 개통식-맨 왼쪽에 정주영 회장, 중간에 육영수 여사와 박대통령이 보인다.-네이버 블로그 펌)
이렇듯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빨리빨리'가 미덕이었다. 가난한 우리나라가 세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고 그들을 따라잡으려면 무엇이든 빨라야 했다. 건설업의 공기단축은 그 단적인 예이다. '호랑이' 정주영은 그 공기단축으로 건설업의 일인자로 우뚝 섰다. 그리고 그 공기단축은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정점에 달했다. 안전불감증이 빚어낸 그 두 사건으로 인해 '빨리빨리'의 신화는 깨져버렸다. '빨리빨리'가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명제를 우리는 그 사건들로 인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빨리빨리'와 부실공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안전'에 대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소방에 입문했을 때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빨리빨리'라는 분위기가 소방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출동 사이렌이 울리면 대기실에 있던 소방관들은 재빨리 차고로 나와 소방차를 타고 가면서 잽싸게 소방복을 입어야 했다. 소방차가 현장에 다다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방호스를 꺼내 화재가 난 건물로 진입했다. 검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문 앞에서 공기호흡기를 차고 불길 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들어 화점에다 대고 물을 쏘았다. 한순간이라도 머뭇거리면 그것은 화재와의 전쟁에서 패배를 의미했다. 가장 빠르게, 가장 정확하게 화점에 물을 쏘아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이 최고이자 최선의 소방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많은 소방관들이 다치고 죽어갔다. 건설업과 마찬가지로 '빨리빨리'문화에서는 소방관의 희생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희생이 언제부터 당연하지 않게 다가온 것일까? 이제는 소방서에서도 빨리 화재를 진압하는 것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화재를 진압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한 지가 꽤 되었다.
(소방관의 빨리빨리-소방에서 '신속'은 무엇보다 중요했다-다음 까페 펌)
하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빨리빨리' 문화가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작년에 있었던 두 명의 소방관의 순직과 불과 열흘 전에 있었던 세명의 소방관의 순직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빨리빨리' 불을 끄고 사람을 구하러 들어갔던 소방관들이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 광주에서 일어난 건축물 붕괴사고도 공통점이 있다. 바로 '빨리빨리' 건물 철거와 신축을 하려는 모 건설사의 '빨리빨리'문화 때문에 -산업화 시기에는 이 방법이 통했었다. 하지만 2020년대인 지금, 우리 아버지 세대를 따라 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6명의 노동자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다시 '빨리빨리'의 망령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의 반열에 접어들어 그들처럼 과정의 중요성을 음미해 볼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결과 지상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어우러져 '빨리빨리'의 망령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빨리빨리'의 폐해를 충분히 겪지 않았던가?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잊었단 말인가?, 2000년대 초의 홍제동 화재를 비롯해서 해년 해마다 계속되는 소방관들의 죽음을 정녕 잊었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한국인들의 특성이라고 불리우는 '냄비근성'과 만나게 된다.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훅' 꺼져버리고 마는, 한국인의 고유정서, 냄비근성!, 이런 게 실제로 있는가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요즘 뉴스를 보고 있으면 확실히 그런 게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문 1면의 탑을 장식하고 9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사건들... 하지만 내일이 돼서 또 다른 사건이 올라오면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시선에서, 관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사람들은 그 뉴스를 보고 흥분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다고 탄식하지만 내일이 되면 또 잊혀진다. 조만간 비슷한 사건이 또 뉴스에 등장할 때까지...
소방관의 어처구니없이 반복되는 순직이 그렇고 공군 조종사의 불시착이 그렇고 위험의 외주화라고 부르는, 산업현장에서의 노동자의 사망이 그렇고, 대기업 공사장에서 반복되는 건축물 붕괴가 그렇지 않은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대책을 세운다고 해 놓고도 그때뿐이다. 비슷한 사건이 연이어 터진다. 이것도 '빨리빨리'문화 때문일까? 요즘 그 터지는 기간이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냄비근성과 맞물려 재발 방지책을 세우는 데도 '빨리빨리'문화가 한몫하고 있는 것 같다.('빨리빨리'란 말은 '대충'이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제발 한번 겪은 사건으로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오답노트'만 잘 작성해 놔도 한번 틀린 문제는 또다시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아는 사실 아닌가?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대비책을 명확히 세워놓는다면 또다시 같은 사건으로 야기될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온 나라를 탄식으로 몰아넣었던 '산불'의 계절이 돌아왔다. 오늘도 전국적으로 몇 건의 산불이 났다. 오늘은 쉽게 꺼졌지만 이대로 가면 몇 개월 후, 초봄이 되어 3년 전 그때와 똑같이 대형 산불로 온 나라의 매스컴이 떠들썩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3년 전과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산불 예방에 만전을 기해야 하겠다. 입산객은 화기를 들고 산에 들어가지 말고 관리부처에서는 산불이 나지 않도록 산불 예방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또다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일은 반복하지 말아야겠다.
(2019년 강원도 산불-중앙일보 갈무리)
한국인의 부정적인 특성인 빨리빨리 문화와 냄비근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묘책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신중함이다, 과정을 중요시 생각하는 꼼꼼함이다. 이런 태도로 우리 주변의 모든 일을 대할 때, 우리는 후진국형 '사고 공화국'에서 벗어나 진정한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