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역마살 Nov 30. 2020

식이장애에 우울증 약을?

식이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그 증상이 혼자 있을 때 더 심하게 발현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도 역설적이게도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밖에서 사 먹을 땐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다가 집에 와서 혼자가 되면 맛도 없는 군것질거리를 입에 쑤셔 넣곤 했다. 폭식증이 생긴 이후에는 역설적이게도 '많이 먹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생겨서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음식량을 조절했지만, 혼자 식사를 하게 되면 미친 듯이 음식을 탐했다.

이런 고충을 주변에 털어놓지도 못했다. 창피해서다. 음식 하나를 조절 못 하고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먹는다고? 나도 겪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음식 앞에서 이성을 잃는 나를 타인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이 나를 이해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엄마한테 얘기를 꺼내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의사들과 엄마를 제외하고는 주변 지인들 그 누구에게도 얘기를 꺼내지 못 했다.

폭식증으로 인해 두 번째로 응급실에 실려가고 난 후, 응급의학과 의사의 진단에 따라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료를 보게 되었다. 심리 상담은 받아본 적이 있어도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의사에게 나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폭식증으로 인해 몇 년째 고생하고 있는데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루 종일 음식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나의 상태에 대해서. 의사는 내 상태가 다른 식이장애 환자들에 비해서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빈번하게 과식을 할 뿐이지, 거식증 환자들처럼 음식을 먹지 못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제거형 폭식증 환자들처럼 먹고 나서 일부러 구토를 하거나 설사약을 먹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영양적으로 과하면 과했지 부족함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의 도움을 받아보자고 했다. 나도 동의했다. 이미 나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은 오래 했었고, 약이든 뭐든 도움을 받아서 고칠 수만 있으면 의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처방받은 약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제 계열의 약인 플루옥세틴, 푸로작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약이었다. 원래는 우울증 치료제로 개발된 약이고 우울증 치료제로도 흔히 사용되는 약인데, 식이장애에 도움이 된다는 효과가 밝혀져 비만이나 식이장애 치료제로도 가장 빈번하게 처방되는 약이라고 한다.

푸로작/플루옥세틴은 몸에 들어가면 약 24시간 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항상 같은 시간에 약을 먹어서 약의 농도를 매일 일정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나는 원래 아침에 일어나서 20mg을 먹었다. 부작용은 보통 약 복용 후 3-4시간 후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냥 속이 메스꺼운 줄 알았는데, 매일 같은 시간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것을 통해 약 부작용을 의심하게 되었다. 메스꺼움이 굉장히 심했다. 처음 2주 간은 속을 안 좋게 해서 폭식을 못 하게 하는 약인가 싶기도 했다. 그리고 발이 붕 뜨는 이상한 느낌이 났다. 약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부작용은 잘 느끼지 못하게 되기는 했다. 약을 6주 정도 복용하자, 잘 느껴지지 않던 배부름이 무엇인지 조금씩 다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부작용으로 속이 안 좋을 때는 메스꺼움 때문이라도 폭식을 하지 않았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약을 복용하니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에 마음 놓고 폭식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약은 나의 식이장애를 고치는 데는 크게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약 3개월 만에 복용을 중단하게 되었다.

약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폭식증은 점점 심해졌다. 나는 폭식에 나의 일상을 점점 점령당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하기 전까지 폭식하고, 일을 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또 자기 전까지 음식을 위에 밀어 넣다가 잠에 들었다. 한국에 와서 정신건강의학과를 바꾸며 새로운 약 처방을 받아보기로 했다. 콘트라브라는 이름의 식욕억제제의 한 종류였다.

이때쯤 나는 폭식으로 인해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식욕억제제라도 먹고 이 날뛰는 식욕을 잠재우고 싶을 뿐이었다. 급한 대로 흔히 ‘나비 약’ 혹은 ‘눈사람 약’이라고 부르는 식욕억제제라도 처방받아서 먹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는 본인도 나비 약을 복용해봤으나, 효과는 강력하지만 부작용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일단 짜증이 너무 늘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고, 빨리 빠진 살인만큼 약을 끊으면 바로 다시 원래 몸으로 요요가 온다고 했다. 특히나 나비 약은 장기 복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웬만한 의지 없이는 무조건 요요가 오는 약이라고 했다. 반면, 콘트라브는 식욕 억제제 치고는 효과가 많이 약하지만, 장기 복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식욕을 서서히 조절할 수 있고, 그래서 약을 끊고 나서도 요요가 덜 하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콘트라브 Contrave라는 이름 자체가 cont(rol) + (c)rave, 먹고 싶은 욕구를 조절하다는 의미인 만큼 탄수화물에 중독된 환자들이 특히나 효과를 본 연구 결과가 있다고 했다.

처음 콘트라브를 복용한 날, 아침 공복에 한 알을 먹고 거의 2-3시까지 배가 고프지 않아서 신기했다. 그러나 찾아오는 심한 멀미. 예전에 푸로작을 먹고 느낀 메스꺼움이 아니라 놀이기구를 몇 시간 탄 것 같은 느낌의 강한 멀미가 와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 날 저녁에 토했다. 며칠 먹고 나면 적응이 돼서 괜찮을 것 같았으나, 멀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극심한 멀미는 서서히 줄어들기는 했지만 콘트라브를 복용하는 4개월 동안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멀미를 감수하고 콘트라브를 4개월 동안이나 복용한 까닭은 약 덕분인지 들끓던 식탐이 조금은 잠잠해졌기 때문이다. 식이장애를 2년 넘게 앓으며 음식에 대한 애증의 관계가 생겨버리고 굉장한 식탐이 생겼었다. 그러나 콘트라브를 복용하면서 음식에 대한 욕심이 조금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폭식에 대한 욕구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음식 생각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고, 음식이 한 번 입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끊기가 어려워서 빈도가 줄기는 했으나 습관적으로 폭식을 계속했다. 결국, 어느 정도의 식탐 조절 효과를 얻었으나 부작용을 감수하고 계속 복용할 정도의 효과는 아니라고 판단되어 콘트라브 복용을 중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정신건강의학과를 옮기면서 가장 최근에 처방받은 약은 토피라메이트와 푸로작/플루옥세틴의 조합이다. 푸로작은 이전에 복용해봐서 그런지, 아니면 예전의 반 용량만을 복용해서 그런지 부작용을 또 경험하지는 않았다. 토피라메이트의 부작용으로는 손 저림이 있었으나 한 3일 후에는 사라졌다. 효과는 복용한 약들 중 가장 좋았다. 처음 약 열흘은 거의 하루 종일 음식 생각을 하지 않았다. 3년 동안 하루 종일 음식 생각에 시달리던 사람이 음식에 대한 집착을 놓게 된 것이다. 음식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이토록 산뜻한 것인지 정말 오랜만에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한 열흘이 지나자 다시 스멀스멀 음식 생각이 올라오고 폭식 욕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병원에서 다양한 약들을 복용해보면서 알게 된 것은 식이장애는 약으로 완벽하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조울증은 약을 먹으면 눈에 띄게 조절할 수 있어요. 그래서 치료의 종결이라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식이장애 환자들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못 보는 경우도 많아요. 치료의 종결이라는 것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에요.”
약을 먹는다고 바로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1년 넘게 여러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전부 그 효과가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다만, 식이장애는 단순히 의지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게 약을 사용하든, 아니든, 식이장애로 괴롭다면 혼자 너무 앓지 말고 필요하면 약도 먹고, 병원도 가 보라고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