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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Aug 28. 2020

걔의 눈물 자국

온도에 둔감한 너는 추위를 잘 느끼지 못하니까 슈퍼맨이네, 하던 내가 좋아하던 애의 반응은 내게 약간의 자신감을 심어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자신의 아픈 모습을 고백하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다. 솔직해지자. 나는 어떤 마음일까. 실망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더 애틋해질까, 더 좋아질까. 내가 어떤 마음이 될지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잘 모르겠었다.

내가 좋아하던 애한테 처음으로 내 짝짝이 몸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서 몇 년이 더 흐른 뒤, 나는 다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되면서 붙어다닌 몇 달 동안이나 걔는 단 한 번도 나의 비틀거림이나 절뚝거림이나 뛰지 못함이나 자전거를 탐의 거부 등에 대해서 질문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나에 대한 배려라고 느껴져서 고맙기도 하면서도, 얘는 그게 궁금하지 않은지가 궁금했다. 걔랑 붙어 다니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난 그래도 대충 설명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예전에 고등학생 때 수술을 해서 몸이 약하다고 먼저 넌지시 언급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걔가 먼저 각을 잡고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바로 그 날이야. 오늘 우리의 대화 주제가 바로 네 몸이야. 오늘은 네가 얘기를 할거야.”
나는 걔가 너무 확신에 차서 각을 잡고 말해서 거기에 약간 쫄았다. 그래서 일단 그 말을 듣자마자 노라고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노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오늘은 별 수 없이 얘한테 여태껏 내 초등학교 동창 한 명, 중학교 동창 한 명, 단 두 명한테만 자세하게 말해줬던 수술 얘기를 해줘야겠구나 싶은 직감이 들었다. 그 직감은 적중했다.


걔가 그렇게 각을 잡을 때 우린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르막길 때문에 숨이 차기 시작한 와중에 못 이기는 척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18살에 수술을 하고 그 이후에 후유증이 남아서 입원을 반년 동안이나 한 것, 그리고 그 후유증이 앞으로도 아마 나와 함께 남아있을 것 같다는 것. 그 얘기를 듣던 걔는 처음에는 자꾸만 질문을 해서 나를 조금 짜증 나게 했다. 그래도 난 이왕 얘기를 꺼낸 거 걔의 질문에 다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난 내 수술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약간씩 흘리는데, 다행히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숨을 약간 더 오버해서 몰아쉬면서 눈물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를 약간 숨길 수 있었고, 땀을 닦는 척하면서 눈물을 살짝씩 닦아낼 수 있었다. 내 얘기 초반엔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채로 내 말을 듣고만 있던 걔는 내가 얘기를 마치고 걔 쪽을 휙 쳐다보자 이렇게 말했다.
“너 정말 강한 사람이었구나. 비슷한 일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힘든 일을 겪었구나. 너 진짜 대단하다. 힘든 시간이었겠다.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게.”
그 얘기를 듣고 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걔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걔가 나한테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손톱으로 내 살을 꾹 누르면서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해서 일부러 좁은 골목길로 가서 걔 앞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걔가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그리고 이마의 땀을 닦는 척 하면서 계속 눈가를 꾹꾹 누르고 해가 지고 있었지만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선글라스를 꺼내서 쓰는데 걔가 내 손목을 툭 잡았다. 내 손목을 잡으면서 걔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 다 괜찮아. 내가 너를 돌봐줄 거야.”

그 얘기를 하는 걔 얼굴을 쳐다보니까 걔도 조금 운 것 같았다. 걔 얼굴엔 눈물 자국이 있었다. 난 걔의 눈물을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걔한테 내 아팠던 기억들을 조금 꺼내서 보여주고 나자, 난 역시 걔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들키지 않으려고 꽁꽁 싸매 놓고 가슴에 숨겨놓고 있던 것을 둘둘 풀어서 하나하나 낱낱이 다 보여주고 나니까, 그 싸매 놨던 것들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어서 조금 가벼워진 듯 한 기분도 들었다. 잘한 것 같은데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약점을 걔가 낱낱이 들여다봤는데도 부끄럽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걔가 그걸 들여다보고 조금 울어서 그랬을까. 난 그 눈물 자국에서 걔의 사랑을 조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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