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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Sep 07. 2020

걔의 눈물 자국 2

내가 좋아하던 애한테 나의 수술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 얘기를 하는 내내 ‘얘가 이 얘기를 듣고 나서도 나를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와의 관계를 포기한 이유는 대부분이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앞으로 영원히 달릴 수 없고, 앞으로 영원히 다리를 조금씩 절면서 천천히 살아야 하는 나를, 나를 나 그대로 좋아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오는 두려움. 내가 나의 아팠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자, 내가 좋아하는 걔는 이제 너를 내가 보살펴 주겠다고 말했다. 난 그 말에 많이 고마웠고, 그래서 그 날은 걔에게 고마워하느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날부터 난 걔의 눈치를 약간씩 살폈던 것 같다. 걔도 내 얘기를 듣는 그 순간에는 수술을 받고 그 후유증을 나름 잘 이겨낸 내가 대단하다고, 얘를 이젠 내가 잘 보살펴 줘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또 그날 밤에 자면서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하필 왜 아픈 애를 만나고 있는 걸까, 난 얘의 이런 모습까지도 좋아할 수 있을까, 얘랑 더 오래 만날 수 있을까, 만난다면 얼마나 오래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 아마 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의 끝이 어딘지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나 조차도 내가 평생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몇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타인이 이런 내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해 줄 거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난 며칠 동안 걔의 눈치를 살폈고, 걔가 계속해서 별 말이 없이 날 이전과 똑같이 대하자, 점차 눈치를 보는 것을 그만두고 편하게 걔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계속해서 만났다. 그러다가 내가 걔한테 내 수술 얘기를 하고 9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난 다시 한번 걔한테 진지하게 나의 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여행 중이었는데, 나는 걔 때문에 좀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여행 중에 가뜩이나 평소보다 적게 쉬고 많이 움직여서 몸이 지친 상태였다. 몸이 지친 날에는 나는 평소보다 더 균형을 못 잡고 절뚝거리게 된다. 걘 그걸 뻔히 알면서도 그 날 내가 절뚝거리면서 걷는 모습을 보고 그래도 똑바로 걸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지 않겠냐고 잔소리를 해댔다. 내가 너무 골반을 흔들면서 걷는다고 말하면서 골반을 꼭 잡고 걸으라고 말했다.


한두 번 하다가 마려나 싶었던 걔의 잔소리는 그날따라 끝나지를 않고 내 뒤통수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는 결국 폭발해서 걔한테 화를 내고 말았다. 나 좀 그냥 내버려 두라고, 네가 대체 뭘 아냐고, 잘난 척 좀 하지 말라고, 네가 아파보지도 않았으면 그냥 조용히 좀 있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걔는 나의 말에도 지지 않고 
‘다 널 위한 거야. 아무리 몸이 지쳤어도 바른 자세로 걷기 위해서 노력해야 네 몸이 더 나아지지.’

라고 말했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는 
‘평소에도 너 운동할 때 균형 잡는 연습 좀 더 해. 한 발로 서 있는 걸 20분씩 매일 하면 어때? 그걸 매일 하면 너 몸의 밸런스가 더 좋아질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난 한 번 더 폭발하고 말았다. 대체 얘는 왜 1절만 하지 못 하는 걸까, 그만 말하랬으면 제발 그만 말 하지 왜 이렇게 나를 짜증 나게 할까 싶었다. 그래서
‘네가 대체 뭘 아는데. 알지도 못하면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더 나아져? 대체 뭐가 더 나아지는데? 의사가 나한테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때, 내가 그 말에 괜찮아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네가 이제 와서 나한테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똑바로 걸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고?’

라고 쏘아붙였다. ‘의사가 나한테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을 때’를 말할 땐 계속 울고 싶었던 마음이 터져버려 결국 오열하기 시작했다. 걘 당황했다. 내가 걔였어도 엄청 당황했을 것 같다. 똑바로 걸으라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아니라 계속 하긴 했지만) 했다가 갑자기 폭발해서는 갑자기 옛날 얘기까지 꺼내니까. 당황한 걔를 보면서 나도 순간 당황했다. 얘 잘못이 아닌데, 얜 몰라서 그런 건데 너무 심하게 화를 낸 것 같았다. 얘가 당장 나한테 너 대체 성격이 왜 그렇게 꼬였냐며 화를 내도 속상하지만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리고 고맙게도, 걔는 날 이해하려는 시도를 했다. 우선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내게 그렇게 말한 것은 의사가 나에게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은 그걸 몰랐고, 그래서 걷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밸런스 운동을 하면 내 몸이 지금보다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했다.

걔가 그렇게 사과하고 자기 입장을 내게 말한 이상, 나도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애초에 걔한테 쏘아붙이고 나서 곧바로 후회를 하고 있기도 했다. 내가 아무 말 않고 잠자코 있자, 걔는 그 와중에 내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사가 그때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래서 운동을 하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대?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럼 네가 한국에 들어가면 받는 재활 치료는 왜 받는 건데?’
‘근데 그 의사 말만 듣고 그게 사실인지 어떻게 알아? 너 그 의사 한 명의 의견만 들은 거야? 다른 의사를 찾아가 보지 않은 이유는 뭐야?’
등의 울고 있는 나에게 호기심 대장답게 질문을 막 하는 것이었다. 난 또 걔한테 짜증을 내서 미안한 마음에 훌쩍거리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걔의 질문과 나의 대답의 요점은 결국 그거였다. 운동은 몸이 여기서 더 악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관리 차원에서 평생 해야 하는 것이고, 운동이나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다친 신경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는 것.


여기까지 걔한테 다 말하고 나자, 이젠 정말로 내 모든 약점을 얘한테 다 까서 보여준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몹시 두려워졌다. 심장이 쿵쾅 뛰면서 눈물이 자꾸만 났다. 얘는 어쩌면 시간이 갈수록 내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던 걸까, 이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나를 더 이상 좋아하기 어려워질까, 그런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목구멍을 지나 앞니까지 물음이 차올랐다.
‘이제 넌 내가 여기서 더 회복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지. 그래도 내가 좋아? 그래도 나랑 계속 만날 수 있겠어?’

라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걔가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모르겠어서, 혹시나 걔가 이젠 내가 싫어졌다고 할까 봐 두려워서, 묻지 못했다. 내가 여태껏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듯, 내가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얘를 밀어내야 하나 고민도 살짝 했다. 걘 한참을 아무말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난 그 정적이 너무 무서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러다가 걔가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듯,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는데, 난 네 몸이 여기서 더 회복되지 않는다는 걸 몰랐어. 근데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걸 네가 알아야 해. 네 몸이 아프든, 아프지 않든, 그건 나한테 중요한 건 아니야. 그냥 난 너의 정확한 몸 상태를 알아야 네가 필요하면 도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야. 네가 여기서 더 나아지지 않더라도 나는 아무 상관없어.’


그 말을 들은 나는 또 마음이 내려앉으면서 눈물이 나려고 해서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면서 울음을 참아야 했다. 걔가 과연 온전히 내게 진심을 말 한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걔를, 걔가 정말로 나의 아픔과는 관계없이 나를 좋아한다는 걔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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