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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연고 Nov 29. 2023

노동자의 가치

공감에세이

첫눈이 제가 사는 곳에도 내렸습니다. 물론 비에 금방 젖어버렸지만요. 그래도 얕은 지붕 위에 하얗게 내린 흔적이 남아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소담스럽게 아릅답습니다.


그런데 이번 눈과 비는 그리 반갑지가 않았어요. 이틀 전 지붕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거든요. ㅜ ㅜ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고 있다가, 욕실 구석에서 물방울이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구석 안쪽 벽과 그 밑의 바닥에 물이 흐르고 있는 걸 알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수건들을 잔뜩 가져다 바닥에 놓고 물이 떨어지는 곳마다 이것저것 플라스틱통을 가져다 두었죠. 이 가난한 마음이라니.


지붕수리 전문가를 소개받아 연락을 했더니 다행히 몇 시간 안에 집에 와 주었습니다. 수염과 구레나룻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보여 신기한 마음에 그 구레나룻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습니다. 그런 구레나룻을 가진 사람은 영화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거든요. 척척척 긴 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더니 몇 분 정도 있다가 내려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집 외벽 옆 파이프라인에서도 들려오더군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자신감 넘치게 해내는 모습이 경외롭기까지 했습니다. 문제점과 해결점을 설명해 주는데 그 어떤 교수님의 설명보다 귀에 쏙쏙 들어오고 재밌었습니다.


그렇게 그 지붕수리 전문가는 제게 편안한 마음을 돌려주었지만, 그 몇 분의 가치로 420유로, 한화로 대략 50만 원 정도를 청구해 왔습니다. 꽤 큰 금액이지만, 응급처치 비용이니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겠죠.


그래도 저에게는 남는 일이었던 게, 그 전문가분이 다녀간 후로 지붕은 더 이상 물이 세지 않게 되었고, 그분에게 영감을 받아 노동자에 관한 시도 하나 적었고, 제가 새로 적어가고 있는 에세이북에도 노동자에 관한 에세이를 하나 적어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닥터 스트레인지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25년간 지붕수리 전문가로 일해 온 자영업자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은 노동자의 위상과 가치가 꽤 높습니다. 공부를 오래 한 이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수입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높을 때도 있죠. 노동자를 존중해 주고 대우해 주는 이 사회가 늘 대단해 보이고 그래서 가끔은 부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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