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는 거야

by 브라보연진아

“왜 하필 이스탄불이야?” 친구들은 묻는다.
솔직히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이 가장 적절한 답이지 싶다.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비행시간이 짧고, 물가가 저렴하다는 게 결정적이었다고 할까. 그러다 ‘왜니?’ 하며 나에게 물어봤다. 중학생 때였다. 우리 반에 소설책 한 권이 돌았다. 반 전체 아이들이 거의 다 읽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 소설의 배경 도시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비잔틴 제국, 때마침 배우던 세계사와 함께 난 이 도시에 매료되었다. 황제 이름이 도시의 이름이라니, 그 자체가 신비롭고 멋지게만 느껴졌다. 길고 낯선 이름이었지만, 입에 감기는 발음이 나왔다. 이 도시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정작 콘스탄티노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인데도 말이다.




비행기와 숙소 같은 큰 결정을 해 놓고 나니, 여행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이스탄불을 공부해야겠다 싶어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이루는 단어들이 하나같이 낯설었다. 지명, 인명, 음식, 전부 생소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나는 일정을 잡기에 앞서 단어들을 쭉 나열해 보기로 했다. 함께 가는 친구가 정보를 빠르게 정리하는 걸 보며, 나열된 단어들과 찾아 놓았던 정보들을 넘겼다. 그리고 나는 더 심화된 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역사와 예술 이야기에 끌렸던 나는 이스탄불 여행은 마치 과거로 들어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여행을 준비할 때면, 매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언니는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간다고 했다. 나는 그 과정이 부럽기만 했다. 떠나기 전날 언니와 나는 고추장을 볶는 엄마 옆에서 볶아지는 고추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고기까지 넣어 볶은 달달하고 짭짤한 고추장은 평소 먹던 것과는 달랐다. 고추장 단지를 언니는 배낭 깊숙이 넣고 나서야, 옷가지들을 챙기 시작했다. ‘그 무거운걸 어떻게 메고 다닐 거야? ’하며 나는 말로 살짝 어깃장을 놓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언니는 짐정리를 하고 있었다. 여행 후일 담으로 바게트에 발라 먹었더니 쨈보다 더 맛있었고, 주변인들한테 인기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요즘엔 마트 가면 볶음 고추장이 튜브 형태로 나와 손쉽게 여행상품으로 구매할 수 있지만, 그때 고추장 볶음은 나에게 살짝 충격이었다.

이후 언니는 여행에 사용했던 지도들을 오랫동안 보관했었다. 지도도 다 돈 주고 사야 한다며, 내가 여행을 가게 되면 자기 걸 기꺼이 내주겠다는 말에, 심심할 때면 그 지도를 펼쳐보며 나의 여행을 꿈꾸곤 했다. 나 또한 언젠가 다시 쓸 날이 오기를 바라며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 지도들은 더 이상 아무 구실을 하지 못하고 버려졌다.

이젠 지도 대신 구글 지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검색하면, 명소 설명, 근처 맛집, 카페, 심지어 사진 스폿까지 모든 것을 알려준다. 종이 지도를 들고 다니다 길을 헤매던 시절엔, 우연히 찾아든 길목에서 만난 작은 보물 같은 순간들이 있었는데, 이런 감성이 디지털 지도에서는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이스탄불을 ‘지붕 없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부른 토인비의 말이 정말 실감이 났다. 서울보다 대약 9배 더 큰 이 도시는 곳곳에 종교와 문명이 교차한 흔적을 품고 있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역사적인 유적과 현대적인 도시 풍경이 공존하는 모습은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성 소피아 대성당, 블루 모스크, 갈라타 다리 같은 상징적인 장소들이 이 거대한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스탄불이 미식의 도시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음식의 종류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다양했다. 특히 이스탄불의 전통 커피인 '터키식 커피'는 미세한 커피 가루가 입 안에 남는 묘한 느낌과 함께 독특한 풍미를 자랑한다고 한다. 그들이 나누는 커피 한 잔에 담긴 이야기와 문화가 무척 궁금하다.




이스탄불 기행[진순신지음]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세밀화가 있다. 미니어처 세밀화로 보였다.

책에서 본 그림이라, 작가도 다른 정보가 전혀 없이 오로지 그림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가지고 움직인다. 톱카프 궁전 같아 보인다.

왕이 행차라도 하는지……. 누가 왕일까?

윌리를 찾듯 왕을 찾아본다.

터번이 비슷하고 지위에 따른 터번의 형태를 알 수 없어,

누군지는 모르겠다.

제일 좋아 보이는 말을 타고 있나?

왕이니 금색으로 칠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말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궁정의 문 앞에서

대기하며, 또 누군가는 멀리 있는 행렬을 바라본다.

나 역시 이 여행을 앞두고 생각과 준비로 바쁘다.

분주하기만 한 내 마음과 같아서인지 이 그림에 끌리기

시작했다.

말 위에 앉은 한 인물은 길잡이를 상징하는 듯하다.


톱카프궁전_세밀화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만은 아니다.

금빛으로 빛나는 궁전의 모습, 군사 행렬, 일상 속의

작은 장면들까지.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는 기록이다.

그런 세밀화들을 보면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게 된다.

어쩌면 이 도시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세밀화를 감상하는 것과 닮았을지 모르겠다.

원근법 없이 모든 것이 같은 비중으로 나란히 존재하고,

그 안에서 내가 상상력을 더해 보는 것처럼 말이다.


금색, 붉은색, 파란색이 화려하면서도 신비롭게 어우러진다.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에 몰두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여행을 준비하는 내 모습 같았다.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가 금박처럼 반짝인다면,

그것은 이 여정에서 내가 느낀 감동과 배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금박은 이스탄불의 빛과 이야기가 남긴 흔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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