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덕길이다.
이스탄불의 한 언덕, 오래된 돌계단 옆에 숨은 채 살아왔다.
내 몸엔 낡은 벽과 낙서,
그리고 세월의 발자국이 겹겹이 쌓였다.
사람들은 나를 걷는다. 하지만 나를 보지는 않는다.
오늘도 누군가 헉헉대며 나를 오른다.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다.
이스탄불은 태생부터 경사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땅은,
높낮이로 뒤엉킨 땅의 주름 위에 억지로 집을 얹고,
골목을 깎고, 계단을 쌓아 길을 만들었다.
특히 옛 도심은 일곱 개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그건 로마처럼 제국을 닮고 싶어 한 황제의 야망이었다.
그래서 나 같은 골목은
언제나 숨을 고르는 자들의 무릎 아래 있었다.
나는 길이 아니라, 숨결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자들에게는 기억이고,
아래로 내려오는 자들에게는 안도였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처럼 골목이 되어 보았다.
『내 이름은 빨강』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세밀화는 모든 것을 평평하게, 의미의 순서대로 배열한다.
반면 원근법은 시점을 기준으로 거리를 따진다.
이 책은 결국, 어떤 시선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스탄불을 걸으며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도시는 예상보다 훨씬 입체적이었다.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랐고,
어느 골목에 서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이스탄불은 세밀화의 도시가 아니라,
원근법의 도시였다.
중심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마다 자신만의 중심을 가졌다.
그곳에서 나는 '정답'보다는 '방향'을 생각하게 됐다.
이틀째 되던 날,
유난스럽게도 피자나 파스타가 먹고 싶어 졌다.
나의 여행 친구가 숙소 근처 피자집을 찾았다.
언덕 앞에서 친구가 물었다
"올라갈 수 있죠?"
'여기가 끝이겠지' 싶으면, 돌아, 또 언덕.
그 피자집을 오르던 언덕은
사진에 담지 못했다.
언덕을 오르기가 너무 버거워 사진을 찍을 생각조차 못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도착한 피자집에서
맛본 피자는 정말 달콤했다.
피자가게 유리창 너머 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발걸음에 눈물이 났다.
20살 2월... 서울에 올라오던 밤이 생각났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돌아와 보니 이스탄불은 언덕이었다.
이스탄불에서의 골목은 계단으로 시작되었다.
숙소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이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이 도시가 계단의 도시라는 걸 미처 몰랐다.
처음엔 ‘이 정도 계단쯤이야’ 싶었다.
깨진 병 조각, 담배꽁초, 누군가 남긴 낙서가
엉켜 있는 계단은 조금 험악했지만,
그보다 먼저 느낀 건 낯섦이었다.
한때 누군가 덧칠했을 무지개는 거의 지워져 있었고,
틈새마다 풀이 비집고 올라와 있었다.
그날은 그저 지나쳤던 이 풍경이, 지금은 이상하게 반갑다.
이스탄불에서의 모든 길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위에서 보니 살벌한 경사길이 평평해 보였다
멀리서 보니, 평범한 골목이었다
갈라타를 올라가는 길은, 정말 미칠 뻔했다.
이 언덕은 전용 트램이 있을 정도니까.
어떻게 이런 비탈에 집을 짓고
가게를 열고
삶을 이어온 걸까.
매일을 버티며 오르내린 사람들의 다리엔
도대체 어떤 근육이 붙어 있을까.
나는 그저 걸었다
다리에 온 힘을 쥐어짜고
숨소리와 발끝, 무릎의 각도까지
신경을 곤두세운 채 걸었다.
한 모퉁이를 돌면 또 언덕,
다시 돌면 또 언덕.
끝이 없었다.
마침내 타워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숨은 가빠지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그 모든 경사가 한 장의 사진에
아무 일도 아니란 듯 평평하게 담겼다.
그게 아쉬웠다.
이 언덕은,
직접 걸어봐야 안다.
사진 속 이 골목은
뭘 하러 지나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하고
잠깐 멈춰서 물이라도 샀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건 조용했다는 거다.
낮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가게도 거의 닫혀 있었고
소리보다 색이 더 크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하늘이 맑았고
건물 색이 유난히 선명했다.
이 도시가 낡아 보이기보다 오래돼 보인 건
이런 골목들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골목은 처음엔
뭔가 공사 중인 줄 알았다.
노란 철골이 길을 막고 있었고
그 뒤로 계단이 보였다.
오토바이가 한 대
대놓고 정면에 세워져 있었고
화분은 아무렇지 않게
양옆을 지키고 있었다.
공사 같기도 하고
설치미술 같기도 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니
그냥 일상의 일부인 것 같았다.
지나가면서 한 컷,
왜 찍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근데 계속 눈에 밟힌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조금 전까지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계단,
이제는 그 풍경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이 계단은 사진 명소다.
사람들은 여기서 시간을 멈추고,
배경 삼아 추억을 남긴다.
앞에 보이는 두 친구도
장난처럼, 놀이처럼 사진을 찍고 있다.
붉은 벽돌 계단은 어딘가 어설프게 이어져 있고,
담장에는 이름 모를 식물들이 매달려 있다.
모든 것이 낡았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골목 아래, 나의 여행 친구가 보인다.
그 존재까지 이 한 장에 담기니,
이제 이 기억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을 것 같다.
햇빛이 건물 벽을 타고 흘렀다.
세탁물이 바람에 흔들리고,
계단은 쓸쓸하게 위로 뻗어 있었다.
낯선 동네, 낯선 풍경.
누군가의 일상 한쪽을 스치며
그냥 지나쳤다.
기억도, 감정도
그날 햇빛처럼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한참을 올라서야 비로소
이 풍경이 보였다.
기억 속 풍경은 언제나
오르막 뒤에 있었다.
저 멀리,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엔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고 있었다.
내가 숨을 고르며 올려다보던 그 자리에서
그들은 창을 열고, 빨래를 걷고, 전화를 받았다.
도시는 멀리,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날,
나는 낯선 도시의 언덕 위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