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마셨다. 커피의 향 때문인지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어른의 음식에 눈독을 들였다.
손님들이 가신 후 잔에 남은 한 방울을 맛보기 위해
고개를 최대한 뒤로 젖히고 혀를 내밀었다.
금지된 것들은 정말 달콤하다.
호기심으로 몰래 마신 커피에 빠져,
지금까지도 커피를 좋아한다.
학창 시절에는 당당히 마셨다.
내 입맛에 맞는 커피 맛을 만들어 마셨다.
초저녁 잠이 많았던 나에게 커피는 보약 같은 존재였다.
학생 때는 공부를 핑계로, 사회인이 되어서는
야근과 체력을 탓하며 커피를 마셔왔다.
커피를 끊었다. 문득 '굳이 커피를 마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 P인 나는 한 치 앞만 보고 산다.
피곤하지도 않았고, 잠을 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안 마셔보고 싶었다.
'커피 없이 살 수 있나?' 하는 이상한 호기심.
충동으로 시작했다.
견딜 만했다. 아니, 커피가 당기지 않았다.
위내시경을 마친 날에도 죽보다 커피를 먼저 찾던 나였는데,
신기하게도 갈증이 일지 않았다.
일상의 모든 우선순위를 차지했던 존재가 사라지자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늘 안갯속을 헤매듯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온몸이 아팠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까지는 괜찮았다.
유독 종아리가 문제였다.
고질적인 부종 탓에 밤마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던 다리가
이번엔 돌덩이처럼 굳어버렸다.
평소처럼 마사지기에 다리를 올렸지만 시원함 대신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후 볶았다.
밤새 앓고 나면 가라앉던 부기도 아침까지
끈질기게 발목을 움켜쥐었다.
통증은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로,
다시 등줄기를 타고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이상 신호를 감지하고 찾아낸 답은 뜻밖에도 '금단 현상'이었다.
커피 한 잔 끊었을 뿐인데 몸이 이토록 처절하게 항의할 줄이야.
늘 나를 괴롭히던 수면 부족 두통이나 졸음이 올 거라 예상했지만,
카페인은 내 근육과 감각을 정조준했다.
카페인이라는 천연 마취제가 사라지자,
그간 억눌려 있던 몸의 통증들이 일제히 깨어나
자기 존재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카페인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은 혹독한 통과의례 같았다.
스치는 이불깃조차 칼날처럼 느껴질 만큼 예민해진
몸을 진통제로 달래며 열흘을 버텼다.
낮이 달라졌다. 식사 후마다 무겁게
눈꺼풀을 짓누르던 식곤증이 옅어졌다.
억지로 카페인을 들이부어 만든 가짜 각성이 아니라,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본연의 맑은 정신이 고개를 들었다.
다리가 달라졌다. 금단을 겪는 동안은 다리가 지독하게 아팠지만,
그 시간을 지나고 나니 저녁마다 찾아오던
붓기와 냉감이 줄었다.
순환이 막힌 듯한 느낌, 발끝이 얼어붙는 느낌,
밤이면 다리를 주물러야 했던 일을 안 해도 되었다.
숙면은 없었다. 커피를 안 마신 지 두어 달이 되어 가지만
나는 여전히 잠들기 어렵고,
두세 번에서 서너 번까지 깨는 것도 여전하다.
하지만, 두통이 사라졌다.
두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내 몸은 두세 배 가벼워진 느낌이다.
커피가 두렵다. 가끔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산미가 유혹하긴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금단의 터널을 다시 통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차(茶)가 가진 은은한 결을 배우고 있다.
녹차에 꿀 한 스푼을 섞어 마시며 자극 없는 단맛에 감탄하고,
구수한 보리차의 온기에서 평온을 찾는다.
굳이 마실 필요가 없음을 깨달은 지금,
다시 그 중독의 늪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커피의 화려한 맛은 잃었을지 몰라도,
나는 이제야 내 몸의 리듬으로 살기 시작했다.
카페인은 내게 자양강장제가 아니었다.
내 몸이 보내는 비명을 듣지 못하게 막아버린,
아주 달콤하고도 비겁한 마취제였다.
그게 사라진 자리에 뒤늦게 밀려온 통증을 견디며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내 몸을 속이며, 빌려온 활기를 내 것인 양 쓰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그 검은 늪에서 발을 뺀다.
여전히 그 향이 그립고 가끔은 흔들리겠지만,
다시 돌아가지는 않을 거다.
조금 피곤하고 때로는 욱신거려도,
이제는 마취되지 않은 맨몸으로 내 삶을 온전히 마주하고 싶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셔보고 싶던 '바샤 커피'를 선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