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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 병아리들

―변상벽의 <모계영자도>

by 브라보연진아



우연히 한 아이가 학교 앞 노점상에서 병아리 두 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키우는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 베란다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병아리를 정성으로 돌보았다. 안타깝게도 한 마리는 일찍 죽었고, 다른 한 마리는 쑥쑥 자랐다. 매일 먹이를 주고, 산책도 같이 했다. 눈을 맞추고, 이름도 지어 불러주자 둘은 친구가 되었다. 아이의 사랑을 받은 병아리는 무럭무럭 자라 닭이 되었다.




병아리가 잘 자라자, 아빠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동물 병원에서 검진을 받게 하고, 모이도 주문했다. 하지만 엄마는 극심히 반대했다. 이유가 있었다. 병아리가 사는 공간은 베란다였지만, 거실, 방, 욕실, 주방까지 모든 곳을 휘젓고 다녔다. 매일 목욕을 시키고, 가족이 쓰는 수건을 사용했다. 가족이 사용하는 물건을 병아리와 함께하는 부분에 엄마는 특히 예민했다. 아이는 엄마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병아리에게 애정을 듬뿍 주었다. 닭과 매일 산책을 하면서 이 아이는 아파트 단지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딸을 타이르기도 하고 혼내기도 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도 계속 사랑하는 닭을 키우겠다고….

하루는 아이가 나에게 가족여행을 간다며 좋아했다. 닭은 데려갈 수 없으니, 외할머니가 보호해 주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닭의 운명을. 닭은 곧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난 이 아이가 닭과 헤어져서 오래 슬퍼할 줄 알았다. 예상은 기우였다. 아이는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작은 변화는 나에게 일어났다. 닭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다. ‘닭’은 이름만으로도 비호감이었다. 오직 인간이 먹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 같았다. 나는 아이가 병아리를 데려오는 과정부터 닭이 되어 가는 과정까지 지켜보았다. 노란 병아리의 보송한 털이 깃털로 바뀌며 성장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이의 손길을 잘 버텨낸 것도 대견스러웠다. 내가 가장 놀랐던 부분이 깃털이다. 매일 목욕을 시킨 탓인지 깃털에는 윤기가 났다. ‘예쁘다’, ‘손끝으로 쓸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간간히 뉴스에서 보았던 닭장 속 닭들은 보는 내내 불편했고, 답답했다. 화면을 뚫고 닭장의 역한 냄새가 풍기는 듯 해 언제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지만 아이가 키운 닭에선 샴푸 덕분인지 향기가 났다. 사랑을 듬뿍 받은 닭은 정말 아름다웠다.





조선시대 화가 변상벽의 <모계영자도>는 암탉이 뜰에서 병아리들에게 모이를 나눠주는 그림이다. 주변에 괴석과 찔레꽃, 벌, 나비 등이 어우러져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이 그림에서 깃털 부분에 눈길이 가장 먼저 간다. 깃털은 비스듬히 경사각을 만들며 뒤쪽으로 갈수록 우아하다. 어미 닭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병아리들이 보인다. 닭과 병아리들에게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꽃도 있고, 나비도 날아다닌다. 다시 닭의 깃털을 본다. 반질반질 윤기가 있나 하고 좀 더 시간을 갖고 살펴보았다.

모계영자도_1.jpg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어미닭의 부리에 벌레가 있었다. 이 벌레를 받아먹으려고 어미 닭 주변으로 병아리들이 모여들었구나 하며 다시 본다. 누구 하나 먼저 달라고 보채지 않고 어미 닭을 기다린다. 부리를 벌린 병아리들이 없다. 새 둥지의 어린 새들은 어미의 먹이를 받아먹으려고 모두가 한껏 부리를 벌리지만, 그림 속의 병아리들을 기다릴 줄 아는 것 같다. 병아리들의 행동에 마음이 흐뭇해진다. 어미 닭은 공평해 보인다. 정겹고, 모정이 느껴진다.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가 귀엽다. 따뜻한 보물을 찾은 기분이다. 미처 못 보고 지나쳤으면 어쩔 뻔했을까? 다시 보니, 닭의 맑은 눈동자에도 사랑스러움이 충만하다. 조그마한 병아리들의 눈동자까지도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미소를 짓는 듯한 부리의 모양새에, 나도 따라 미소를 짓게 된다. 깨진 그릇에서 첨벙첨벙하는 녀석, 어미 닭의 다리 밑에서 졸고 있는 녀석, 모두 앙증맞다. 가정집 앞마당이라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듬직한 돌덩이도 모두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있다.





귀여운 병아리들이 가득인 걸 보면, 다산(多産)을 기원하며 그림을 그렸나 싶다. 안방에 들여놓으면, 다산과 화목(和睦)이 함께하니 이 보다 더 좋은 그림이 있을까. 선비의 방에는 볏이 있는 수탉을 그려놓아 장원급제를 염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림 속의 닭에게는 멋지고 꼿꼿한 볏이 보이지 않는다. 가족 그림 같은 닭 그림에 수탉 보이지 않다니, 그 부재(不在)가 새삼 궁금해진다.


모계영자도.jpg 변상벽, 모계영자도, 비단에 엷은 채색, 100.9x50cm, 17_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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