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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뚠뚠 Aug 30. 2021

우리 가족 동시대회

이렇게 10년 키웠어요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와보니 아이가 갖고 노는 장난감 칠판에 글자가 몇 줄 적혀있었다. 여느 때처럼 별 의미 없는 낙서를 해놓았나 보다 싶어 얼핏 봤는데 동시를 적어 놓은 것 같았다. 제목은 '가을'. 학교에서 동시를 배운다고 들었는데 수업시간에 배운 시를 베껴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가 다가오더니 아빠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 여기에 적힌 시 봤어?”

“응.”

“어때?”

“응 글씨 잘 썼던데? 학교에서 배운 시야?”

“아니 내가 쓴 거다~”  

   

뭐.. 뭐라고? 아무리 내가 고슴도치 아빠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맹세코 교과서에 나오는 동시라고 믿을 정도로 시의 수준이 훌륭했다. 아마도 믿지 못할 여러분들을 위해 원본 공개한다. 각자 판단해주시기 바란다.

          


아이에게 잘 썼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니 자기는 시 쓰는 게 그리고 읽는 게 재밌다고 했다. 시가 재밌다니. 아빠는 40년을 훌쩍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결코 단 한 번도 시를 재미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시는 그저 교과서에 나오거나 시험 속 지문에서나 만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님은 갔습니다.’에서 ‘님’은 ‘빼앗긴 조국’이었고 ‘성북동 비둘기’는 ‘문명에 의해 파괴된 자연’을 뜻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시를 재밌다고 표현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평소 책을 자주 읽는 습관 때문인가? 모든 아이들이 잠깐씩 갖는 호기심인가? 아니 어쩌면 아빠의 천부적인 국어 실력을 이어받은 것인가? 가만있어보자... 내 딸이 시인이 된다? 흠 멋지긴 한데 요즘 시 써서 먹고 살만 한가? 등등 생각이 또 쓸데없이 온 사방으로 펼쳐졌으나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학교에서 동시를 배웠는데 수업 때 읽은 시들이 재미있었나 보다. 그리고 그맘때쯤 아빠와 함께 읽는 어린이 신문에서 정기적으로 어린이 독자들이 보낸 시가 실렸는데 그 시들을 보고 자기도 한번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빠가 신문사에 대신 보내줄 테니 너도 한번 동시를 써보라고 했다. 며칠 후, 이번에도 역시 다음과 같은 세기의 명작이 탄생하였다. 역시 원본 공개한다.   

       

이럴 수가! 변기를 의인화하다니!! 무엇보다 그냥 스쳐 지나갈 법한 하찮은 소재에 감정을 이입시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살면서 변기가 더러운 휴지나 똥오줌만 먹느라 불쌍하고 힘들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느냔 말이다!      


뭔가 느낌이 왔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으로 치면 어사 박문수와 방랑시인 김삿갓이 쌍으로 울고 갈 장원급제 감이라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신문사에 딸아이가 쓴 동시를 접수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주 두 주... 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매일 아침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문을 펼쳐보았지만 결국 우리가 보낸 시는 소개되지가 않았다. 제대로 김칫국 드링킹.     


그렇다고 풀 죽은 딸 앞에서 나까지 실망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 "시라는 것이 정답이 없어. 아빠는 정말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다른 시를 또 써보자” 이렇게 달래주었다. 그리고 시에 대한 흥미를 유지시켜주기 위해 서점에 가서 아이 눈높이에 맞는 동시집들을 사주기도 했다.     


얼마 후 명절에 가족끼리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들과 더불어 아이가 쓴 동시를 자랑삼아 소개하게 되었다. 한때 어린이 신문사에서 일했던 작은 누나가 이 얘기를 듣더니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아이가 그렇게 시에 관심이 있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를 접할만한 환경을 만들어주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주제를 정해서 온 가족이 모여 동시대회 같은걸 열어도 좋겠다고 했다.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좋은 아이디어였다. 가족 동시대회라니 어쩐지 폼부터 났다. 당연히 실행에 옮겼다. 우리 가족, 한다면 하는 가족이니까.     


어느 일요일 저녁. 실제로 우리 집에선 가족 동시대회가 열렸다. 시의 주제는 주최 측이자 아빠인 내가 정했다. 첫 대회인 만큼 주제 선정에 있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심사숙고 끝에 '오늘', '행복' 등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가족'이 주제로 선정되었다. 아빠 엄마 아이 셋이 거실에 앉아 각자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씩을 쥐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얼마 후 작품이 완성되고 각자 돌아가며 자신의 시를 낭송한 후 엄정한 가족 투표를 거쳐 딸아이의 작품이 장원을 차지하였다. 부상으로는 엄마의 뽀뽀가 수여되었다. 이 자리를 통해 <제1회 우리 가족 동시대회> 영예의 장원 작품을 최초 공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족     


즐겁게 놀 땐 친구와 놀고

공부할 땐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고   


그럼 속상하고 힘들 땐

누구와 있을까?

    

그래

나의 하나뿐인

가족.          



정말 끝으로 어린이 신문 동시 담당자님. 잘 다듬어서 조만간 한번 더 보낼 테니 꼭 관심 가지고 검토해봐 주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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