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서 아이들에 대해 하는 말들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우리가 답하는 질문은 샬롯메이슨의 살아있는 교육 1 '9세 이하 어린이들의 훈련과 교육 가정교육'의 질문을 바탕으로 부부간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기 위해 작성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 3-5)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시하는 아이에 대한 말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2000년 전의 유대 지방 예언자로 여겨지는 예수가 한 말은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급진적일 만큼 어려운 말이다. '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예언자는 누구이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아이는 어른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사례도 다수 등장한다. 넷플릭스 '트로이'를 보면 스파르타의 영웅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아이들의 존재는 어른들의 목적을 위한 소유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목적을 위해 그들의 목숨까지 뺏을 수 있는 연약하며 천대받는 그런 존재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서 시작해서 아이에 대한 인식은 수단이고 도구였다. 당시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고 훌륭한 시민으로 키워내서 잘 활용해야 하는 그런 대상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까지 이어지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반하는 주장은 기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사상적 근간을 이룬다.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에게만 초점을 둔다면 신약 복음서로 오면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인간이 된 하나님인 예수로 인해서 인류의 존엄성으로 확장된 개념이 된다.
복음서는 어린아이에 대해서 영광스러운 존재이자 왕자의 신분으로 묘사한다. 어른들은 오히려 이들을 섬겨야 하는 종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키우는 아이들을 왕자와 공주로 볼 수 있다면 어른들의 태도와 행동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관찰하고 그들의 질문에 전심으로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무시할 수 없다. 요구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답변을 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하는 종으로서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어른보다 아이들이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섬김을 실천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아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복음서와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라는 단어로 검색해봤을 때 나오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아래와 같이 비슷한 구절들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마 19:14)
아이들이 백지상태로 나온다는 것은 이미 고착된 우리의 개념들로부터 나온 것일지 모른다. 가령 진화론과 같은 이론이 거기에 해당한다. 진화론은 무기물에서 우연히 단백질을 형성하고, 단백질에서 우연히 원시 생명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원시 생명체에서 각종 동식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아이들은 동식물과 다름없는 존재로서 시작한다는 말인데 그것은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기만일 수 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나다. 미디어에서 보면 어릴 적부터 언어, 예술, 암기 등 뛰어난 아이들이 꽤 있다. 어쩌면 그것은 뛰어난 것이 아닌 당연한 것 - 물론 특출난 아이는 분명 존재한다 - 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가진 가능성이 일찍이 발현된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를 너무 아이로서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아이를 퇴행하게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와 같이 80-90년 사이 태어난 사람들은 첫돌이 지나면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이 보육기관에 맡겨지는 시기가 더 빨라지면서 36개월이 지나서 배변훈련을 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6살 때까지도 배변훈련을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
책에서는 아이는 우리보다 더 높은 신분에 속한 존재라고 말한다. 양육하고 돌보는 부모는 농부고 맡겨진 아이를 왕자에 비유한다. 내가 생각한 아이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상반된 매우 숭고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묘사한다. 그렇기에 아이는 부모에게 속한 자가 아닌 개별적이고 인격이 있는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최고의 것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이미 그런 그릇이 되어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끌고가야 할 존재가 아닌 섬겨야 할 대상이고 그것이 기독교의 절대적 가르침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아이들은 섬김을 받아야 할 대상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잘 섬기면 아이들은 커서 타인과 미래의 자신들의 아이들도 섬기게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 주는 유익이며 영향력이라 생각한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떤지 삶을 통해서 보여줌으로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로 느낄 수 있도록 실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