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이제는 "질문하고"가 들어가야 하겠다.
사회생활 초기의 한 때, 의사소통 과정중에 수많은 상황에서 "예",
이런 표현을 자주 했었고 그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너무 쉽게 "예"를 해 버리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의 몸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어진 적이 꽤 있었다.
왜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까,
무엇을 책임진다는 의사표현을 너무 빨리 했기에
그것에서 따라오는 부담감이 갑작스레 온 몸과 마음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몸과 마음이 힘들어진 것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쉽게 "예"를 하던 부분에서, 내 자신의 자아로 돌아와서 생각하고 관찰하며 질문을 하는,
결국은 그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 관계를 이어가게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차례 시행착오와 후폭풍이 몰아친 시간들, 그런 경험들을 체득하고 배운 것이었다)
어느 질문에 관한 서적 가운데 명언을 살짝 패러디한 표현이 있다.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어릴 적, 스스로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데, 부모님과 형, 누나들의 기억으로
굉장히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한다.(막 귀찮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갑작스레 하는 질문)
그리고 질문하다가 기억나기로는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도 있다(그 아버지는 9년여 전에 돌아가셨다)
이게 본래의 나의 모습이다.
학창시절, 주된 과목보다 예체능계에서 흥미를 많이 느꼈는데(당연히 공부실력은 뒷자리~^^)
공부는 못하면서 이리저리 질문을 많이 한다고 선생님들에게 혼난 기억이 꽤 있다.
"호기심", 그리고 한 번 무엇이 꽂히면 그것에 집중하는 집중모드,
내게는 그 호기심과 집중모드, 그리고 거기에 따라오는 질문력이 내면에 자리한 듯 하다.
(그래서 지금 북유럽에 대한 관심모드가 늘 텐션이 높고, 이 안에서도 수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호기심, 집중모드, 질문력을 가지고
나는 때로 사람들에게 인기없고 낙인찍힐 수 있는 내부고발을 두 번을 했다
(한 번은 직장에서-그것으로 유망직종을 포기했다, 또 한 번은 교회에서-이제 나는 가나안교인이다)
질문한다는 것,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보통 커뮤니케이션의 네 가지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는 거기에 "질문하고"가 추가되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특히 요즘의 돌아가는 이런저런 사회현상들을 보면서 더욱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나는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내가 사는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교육제도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
수많은 질문이 떠올려지고 더 적극적인 사고로 "비판적 사유"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기게 된다.
왜냐, 이 시대에 그런 비판적 사유를 하지 않으면
지금 대놓고 보여지는 왜곡된 정치적 이데올로기 또는
왜곡된 종교적 가치에 선동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나도 거기에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속 깨어있지 않으면,
종속적으로 미디어환경에 노출되고 그 영향을 받게 되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의해 "선동"되고 그것에 조종되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
지금도 그 이해할 수 없는 "선동"된 이런저런 모습들을 보면서 질문,
그리고 비판적 사유를 해야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확신하며, 표현하게 된다.
계속적으로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것이 나를 살리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살리고,
결국은 모두를 살리게 되는 높고 깊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2022년 세밑(한 해가 끝날 무렵)의 지금, 2023년을 앞두고 내면에 새기는 마음이고 소망이다.
#질문을하는사람이되길
#소망한다
#예
#나는질문한다_고로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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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사유
#살리고_살리게되는가치
#2022년세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