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뭔들 Sep 09. 2022

외로움, 숙명적인 것에 대하여

제작 PD로 살아남기 ⑨ : 프로듀서의 외로움에 관하여

예전에 무한도전으로 명성을 날리던 김태호 피디의 특강을 들으러 간 적이 있었다.

무한도전을 연출하게 된 스타 피디가 되기까지의 노력과 과정은 물론이고, 무한도전을 연출하며 발생하는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얘기했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피디의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피디는 참 외로운 직업이에요.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 위해 조연출, 작가들이랑 회의실에 앉아 있으면, 

가령, 회의실에 밥을 먹기 위해 세팅한다고 했을 때, 

'피디님, 생수를 놓을까요 말까요? 생수는 어떤 걸로 할까요?'

'피디님, 젓가락은 놓을까요 말까요? 젓가락은 나무젓가락으로 할까요, 스텐으로 할까요?'

등등 저에게 온갖 것을 물어보죠. 피디는 그 사이에서 모든 것을 선택하고 책임져야만 해요.

회의가 끝나고 나면 오히려 저는 너무 외로워집니다. 나의 고충은 어느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그들이 느끼는 나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까요."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적으로 이런 뉘앙스로 말을 했던 것 같다.

그전엔 막연히 '피디가 모든 걸 기획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나에게 사소하지만 작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피디라는 직업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이 들었던 듯했다.





드라마 판에 들어와서 나는 종종 제작피디로서 외로움을 많이 느끼곤 했다.

태생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직업적으로 반드시 '숙명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외로움이 따라오곤 했다고 생각한다.


스태프들과 함께 현장에 있지만, 결국 무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주고 결정해줘야만 하는 역할로서,

또 드라마 전체 예산을 관리하고 이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스태프들과 돈 얘기를 하며 'Yes or No'를 해야 하다 보니, 스태프들과 한 현장에 있지만 어딘가 거리감이 들어서 마음만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기도 했다.


보통 어떤 드라마 현장에서 발생하는 불만을 해소하는 것도, 그 불만을 만들어내는 것도 

제작사의 역할이다 보니, 현장의 제작피디의 고충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듯하다.


가끔 어떤 스태프들은 현 드라마 현장의 불만을 풀기 위해 애꿎은 제작피디에게 그 불만을 온전히 쏟아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말을 만들어 제작부들을 힘들게 하는가 하면)

어떤 스태프들은 일을 하기 싫어서 모든 것을 제작피디에게 떠넘기기도 한다.

어떤 날은 여기저기서 제작피디를 찾으며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루를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나면, 

가끔 (사실 아주 자주!) 현장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현장 일각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제작피디의 모습. jpg


어떤 날은 하하호호 웃는 스태프들을 보면서 그들처럼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나 이런 부분들을 신경 쓰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건 드라마 제작피디의 바람일 뿐, 곧장 또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현장의 모든 일을 관할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책임을 다 하는 드라마의 제작피디들에게

외로움은 숙명적인 것과도 같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이전 13화 깎는 자와 깎이는 자, 창과 방패의 대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