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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Aug 15. 2022

깎는 자와 깎이는 자,
창과 방패의 대결

제작 PD로 살아남기 ⑦ : 협상력으로 돈을 깎아보자

제작 PD로서 일하게 되면 좋든 싫든 무조건 해야 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데,

그건 '돈을 깎는 일'이다.


합리적인 예산 안에서 드라마 프로젝트를 운용하여 어느 정도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드라마 사업'이고, 이 사업을 현장 가장 가까이에서 맡아서 하는 사람이 제작 PD다 보니, 아무래도 직접적인 돈을 깎는 일이 부지기수로 발생하곤 한다. 


스태프들과의 계약을 진행할 때는 물론, 어떤 물건을 구매하거나 빌려서 쓰게 되는 경우,

또는 어떤 장소에 가서 촬영을 할 때 장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

하물며 제작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순간순간, 제작 PD는 돈을 깎는 일이 다반사다.

심지어 업계에서는 같은 걸 가져와도 누가 더 돈을 많이 깎았느냐에 따라 제작 PD의 역량을 평가할 정도로, 소위 '돈을 잘 깎는' 제작 PD는 인정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제값을 안 주고 후려치거나 또는 줄 돈을 안 주면서까지 일하는 건 아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더 좋은 다홍치마를 조금 더 저렴한 값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이 있다 보니,

같은 퀄리티라면 이왕이면 조금 더 저렴하게 가져와서 조금이라도 이윤을 더 만들어내는 게 중요할 뿐이다. 

(오히려 제값 그대로 주는 제작 PD들은 능력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니, 그 정도면 말 다했다.)


여기서 제작 PD들 특유의 고충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얼마나, 어떻게 더 깎을 것인가.

구워삶을 것인가, 회유를 할 것인가, 아님 협박(?)을 할 것인가.

아니면 말로 설득할 것인가, 뇌물 아닌 선물(?)을 줄 것인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면 그때부터 제작 PD와 상대편과의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싸움이 시작된다.

깎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깎이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는 법.

즉, 깎는 자와 깎이지 않으려는 자, 창과 방패의 신경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Round 1. 계약하는 자 


스태프들과 계약하는 협상 테이블에선 이러한 기싸움이 더욱 심하다.

자신의 페이를 깎이지 않으려는 자와,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선에서 계약을 하려는 자 사이에는,

둘 다 서로 웃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는 없는 긴장감이 도사린다. 


제작 PD들이 워낙 잘 깎으려 든다는 걸 알기에, 초반부터 일부러 더 높은 금액을 부르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그 사이에 머리를 굴리면서 빠른 판단을 해야 한다.

높은 금액 거품 사이에 숨은 원래 금액을 파악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에 되면 얼마나 좋을까.

노련한 스탭인 경우 협상 테이블을 많이 와봐서 그런지 제작 PD들보다 한 발 앞서 선수를 치곤 한다. 


"저희는 이 정도 금액 OO 드릴 수 있어요."

"에이, 그건 너무 적어요. && 정도는 주셔야 해요. 저 이 돈 아니면 안 해요. 못 해요."


물러서야 하나? 아니면 다시 맞서야 하나? 

머릿속은 핑핑 돌아간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고, 생각도 나지 않는다.

결국 그럴 땐 울며 겨자 먹기로 한발 물러서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 나도 우영우 변호사처럼 고래라도 한번 출몰하면 좋으련만.


이 협상은 제가 좋아하는 고래 퀴즈와 닮았습니다. 숫자만 보면 협상을 할 수가 없어요. 본질을 봐야 해요. 



Round 2. 물건을 가져오는 자.


드라마 현장에는 참으로 많은 물건들 혹은 그 물건을 갖고 있는 수많은 업체들이 도움을 준다.

공사장에서 쓰는 사다리차가 필요할 때도 있고, 

고가의 장소를 갈 때는 엘리베이터 및 구역을 보양작업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세트장 입주 때 필요한 청소업체를 알아봐야 하는 경우도 있으며,

소품용으로 무언가를 빌려서 써야 하는 경우도 많다.

(드라마 현장인가, 막일 현장인가...)


그럴 때도 제작 PD의 협상력은 발휘해야만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깎아서 가져오거나, 같은 값이면 조금 더 많은 혜택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줄 아는 대응력을 갖기 마련.

어르신이라면 친근한 손주나 자식 같은 태도로,

또래라면 공통의 관심사를 건넨다던지 하는 식으로 등등

본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사교성과 친화력을 총동원해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간혹 통하지 않는 분도 있다.

강한 태도로 나오면서 고성을 내지르는 분도 계시니까,

그럴 땐 쿨하게 (하지만 쿨하지 못해 미안해) 돌아서야 한다.

안 그러면 될 것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니까.



Round 3. 장소를 빌려주는 자.


촬영을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약정된 시간을 오버하기 마련이다.

보통은 감독들의 늦은 촬영 속도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으며,

배우가 그날따라 유독 긴장을 해서 연기가 잘 안 된다던지, 혹은 교통체증 등의 외부요인으로 전체적인 시간이 딜레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촬영 스케줄을 짜는 사람들이야 워낙 베테랑들이라 대본만 보면 촬영 속도를 어느 정도 가늠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안 되는 게 사람 일인지라, 그럴 때엔 옆에서 같이 속이 타는 게 제작 PD기도 하다.


가령 카페 같은 곳을 8시부터 11시까지 빌려서 촬영한다 했을 때,

(대본 상황을 보고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촬영할 것이라 생각해, 조연출이 장소섭외팀에 해당 장소를 이 정도 시간으로 빌려달라고 사전에 요청했고, 섭외팀에서는 카페에 3시간만큼의 시간을 전달한다.)

약속된 11시가 가까워오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11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만약 그 장소가 고가의 장소라면? 

이제부터 또 제작 PD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럴 때는 장소섭외팀과 얘기해서 시간을 어느 정도 조정해줄 수 있을지,

조정해준다면 시간당 단가를 얼마 정도 다시 얘기해줄 수 있을지 등등,

돈을 깎기 위한 제작 PD와 장소섭외팀과의 작전회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촬영이 끝나고 최종 장소사용 비용을 협상할 때, 

제작부와 섭외팀은 소위 "무릎을 꿇는다."는 작전이 제일 잘 통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못지않은 출중한 표정 연기력이 더해, 조금이라도 더 깎아야 하는 목표를 수행해야 한다.


(현장에서는 섭외팀에게 무릎은 괜찮냐? 무릎은 살아있냐? 무릎은 남아있냐? 는 등의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만큼 매일매일 호소하는 경우가 일상이기 때문이다..)


한번만 더 깎아주실 수 있나요..?


제작 PD 일을 하면 할수록 느는 것은 연기력이요,

줄어드는 것은 연기력에 비례하는 개인의 양심(?)이라.


오늘도 한 푼이라도 깎기 위해 제작 PD들은 현장으로 향한다. 

그것이, 깎는 자의 숙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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