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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Sep 18. 2021

드라마 제작 현장에 '던져지다'

제가 내일부터 현장에요?

드라마 현장에 '던져졌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날, 회사 대표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회사에서 제작하고 있는 드라마의 현장으로 '내일부터'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시곤 드라마를 담당하고 있던 제작팀장님과 연락해서 현장에 나가라고 하셨다.


'예? 당장 내일부터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일개 막내였던 나는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팀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내일은 하루 종일 인천에서 촬영한다며, 내일 몇 시까지 어디로 오면 된다고 하셨고, 연속 촬영에 늦게 끝날 수 있으니 3일 치 짐을 싸오라고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답하고 집에 가서 3일 치 짐을 쌌다.

그리고 내일 몇 시까지 오라 했으니, (아마 거기 가려면 더 일찍 새벽에 가야만 했다.)

늦지 않게 알람까지 맞춰놓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해야 했으므로,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새벽,

마치 인력시장에서 인력 현장으로 가는 '인력 1'이 된 것처럼,

새벽 공기를 뚫고 몽롱한 정신이었던 나는, 소위 '스탭 버스'를 함께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누가 누군지, 죄다 예민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이 숨 막히는 버스 안의 공기 속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가서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드라마 현장이라는 건 어떤 곳인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도 벅찬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

이곳은 우리 회사에서 제작한 드라마의 주 배경이 되는 고정 장소라고 했다.

차이나타운에 도착하니, 60~70여 명의 사람들이 장비를 내리고, 장비를 옮기고, 누구는 무언가를 또 열심히 만들고 있고, 그곳의 사람들은 각자 포지션에 맞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나는 내 역할이 뭔지, 나는 누구이며, 나는 왜 이곳에 왔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드라마 현장이란 곳에,

나는 말 그대로 '던져졌다.'


조금 이따가 팀장님의 얼굴을 발견하자, 그나마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드디어 이 황무지 같은 곳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하니, 오아시스를 찾아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앞으로 이 드라마의 제작부의 막내(라인 PD)니 열심히 하라고 했다.

팀장님은 연출 감독님을 비롯한, 중요한 사람들, 촬영감독, 조명감독, 오디오 감독, 조연출 등을 비롯한 스탭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냉랭한 사람들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샐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사실 강한 노동강도와 누적된 피로에 누굴 반겨줄 여력이 없었다는 걸 나중에 알긴 했다. 친해진 스탭들이 말해주기도 했고, 나도 그랬으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했다.'


사실, 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는 스스로도 찾지 못했지만,

내 촉은 여기서 '살아남아야만 한다'라고 강하게 시그널을 보내오고 있었다.


드디어 내가 TV에서 본 연예인이 등장했다.

와. 실물로 보니 연예인들은 정말 달랐다.

TV로 보면 다소 평범해 보였던 그들이었을지라도, 실제로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해 남들과 달라 보였다.

와. 내가 연예인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두근두근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러던 와중에 팀장님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됐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팀장님은 푸드트럭 쪽에 붙어서 무언가를 낑낑대고 계셨다.

알고 보니 푸드트럭은 우리 씬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차량인데,

그 푸드트럭의 뚜껑(?)이 고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팀장님은 직접 붙어서 소품팀과 함께 공구를 들고 같이 푸드트럭을 고치고 있었다.

저쪽 어딘가에서는 첫 씬이 촬영되고 있었다.

나는 직접 푸드트럭을 고칠 만한 재주는 없었지만, 옆에서 필요한 심부름을 담당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므로.)

그리고 아주 다행스럽게도, 푸드트럭의 뚜껑은 잘 수리되어 고정되었다.


잠시 후, 첫 씬 촬영을 하고 넘어온 스태프들이 하나둘씩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감독님과 촬영감독님 외 몇 분, 그리고 해당 씬을 촬영하는 배우와 함께 리허설을 시작했다.

TV로 보는 드라마의 여러 씬들 중, 한 씬을 만들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잘 고정된 푸드트럭의 뚜껑(?) 덕분에,

드라마는 어느새 두 번째 씬을 촬영하기 이르렀다.


"스탠바이. 큐!"


감독님의 촬영 싸인을 옆에서 듣고, 그 싸인에 동시 다발적으로 스태프들과 배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내가 '드라마 현장'에 직접 있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그래, 여기가 바로 드라마 현장이구나!'


나는 그렇게 드라마 제작부로서 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월, 벚꽃이 만발했던 어느 봄날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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