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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뭔들 Sep 25. 2021

내가 이러려고 드라마 현장에 왔나

제작부로 산다는 것, 때론 자괴감 들고 괴로워

본격적인 드라마 제작 PD라는 타이틀을 달기 전까지,

드라마 현장의 라인 PD는 통칭 '제작부'로 불린다. 

(드라마 제작부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이전 글 '드라마 제작 PD로 일하고 있습니다'를 참고해주시면 된다.)

요새는 제작부 직급이 낮아도 'ㅇㅇPD'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불러주기는 하지만,

그냥 'ㅇㅇ씨' (혹은 나이가 어리면 그냥 'ㅇㅇ야')로 불리곤 했다.




흔히들 드라마 제작부에 대해서 하는 표현이 있다.

'제작부 = 엄마'라는 것이다.


드라마 제작부는 현장의 엄마라고 한다. 

엄마가 한 집안의 가족들과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관리하면서 각 가족 구성원들의 평안과 안녕(?)을 도모하고 지원하는 것처럼,

드라마 제작부는 한 드라마 현장의 스태프들과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관리하면서, 

각 드라마 구성원들이 최고의 역량을 낼 수 있도록 평안과 안녕(!)을 도모하고 지원한다.


나는 '드라마 제작부'가 '엄마'라는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조금 더 다르게 말하면 '엄마'라는 표현이 주는 어감이 어딘가 적절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엄마는 희생하고, 헌신하고, 자신의 모든 걸 다 내어주는 '헌신의 아이콘' 같은 이미지라서 더 그런지도.

글쎄, 나는 그런 표현보다 조금 다른 말로 제작부를 표현하고 싶다. 



1. 24시 다산 콜센터 


제작부의 전화기는 쉴 틈이 없다.

여기서 전화, 저기서 전화, 심지어 같은 편(?)에게서도 전화(를 포함한 연락 - 카톡, 문자 등)가 무지하게 온다.

그 연락은 아침, 점심, 저녁 내내는 물론이거니와, 한밤중, 새벽 등등 시간과 때를 가리지 않는다.

어디서 이렇게 연락이 오냐고?

현장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 (대략 5~60명 정도) 은 기본이요, 

배우들의 매니저들, 심지어는 같은 팀(제작부)한테서도 올 때가 대다수다.


현장에 뭐가 없다, 지금 당장 뭐가 필요하다, 누가 뭘 찾는다,부터,

누가 버스를 못 타서 지금 현장에 낙오되어 있다, 다음 스케줄 때문에 누가 먼저 넘어가야 한다더라, 

현장에 책임자를 누가 찾는다,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저기 경찰이 떴다, 

내일 아침에 뭐가 필요하다, 아니 근데 아까 그건 왜 그랬냐? 까지 등등,

이유도, 상황도 각양각색이지만, 결국 본질은 단 하나,

'현장에 문제가 생겨서'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거다.


가끔 전화기를 보면, 심한 날은 하루에 100여 통 이상의,

혹은 30개 이상의 카톡방과 200개 이상의 카톡과 문자 메시지를 받은 날도 있었다.

하루는 그런 연락이 버거워서 (체력적인 한계와 부담도 함께 온 날이기도 했다.) 친구들한테 하소연한 적도 있었다.

스태프들은 자기들의 민원 1 통이지만, 

그걸 하루에 50명이 하면, 내가 받는 연락은 그냥 50통이 훌쩍 넘는다고 말이다.


제작부의 전화기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그야말로 스태프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그야말로 '다산 콜센터' 같은 존재다. 


그러면서 제작부는 현장의 막힌 문제를 뻥! 뚫어주는 뚫어뻥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민원 연락을 통해, 막힌 부분을 해소해주는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제작부다.



사진은 본문과 무관합니다.  드라마 촬영 현장의 어느 날.


2. 욕받이 무녀


제작부로서 현장에서 처음 한 일은 아마도, 현장을 통제하는 일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잠깐, 현장을 통제하는 일을 주축으로 하는 파트는 영화와 드라마가 조금 다르다.

영화에서는 모두 '제작부' 소관이지만, 드라마에서는 '연출부'가 주로 맡는다.

그렇지만 갑작스럽게 손이 모자라거나, 혹은 큰 씬의 경우 제작부도 함께 자발적으로 돕기도 한다.


아무튼, 무더웠던 어느 날, 그날도 촬영 장소가 차량 통제가 필요한 씬이었기에,

원활한 촬영을 위해 나는 연출부에게서 무전기를 받아서, 차량 통제를 위해 언덕 아랫길로 내려갔다. 

일방통행이었기에,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차량이 아예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만 하는,

아주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셈이었다.


슛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차량들이 한 대씩 올 때마다 일일이 세워서는,

마치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의 표정으로 빙의해 운전자들에게 하나하나 양해를 구했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차량 통제에 감사하게도(!) 호의적인 편이긴 했지만,

일부 몇몇 고약한 운전자들은 차를 세우면서도 세상 듣도보도 못한 욕지거리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이 길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듣는 걸까 싶어

멘붕 아닌 멘붕, 현타 아닌 현타가 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반 운전자 입장에서는 잘 가던 길을 막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할 터. 

현타는 오지만 운전자들을 심하게 미워해 본 적은 없다.)


가끔 어떤 차량들은 통제에 응하지 않고 속도를 올려 쌩- 지나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무전기로 또 차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현장에 있는 메인 FD나 제작 PD 선배의 욕지거리가 날아오기도 한다. 

어떤 선배들은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가이드를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촬영이 우선인 상황이라 순간적인 욕지거리가 오기도 하는 것이다.


차량을 통제하며 촬영하는 씬들의 경우,

보통은 언제까지 하염없이 차들을 막아 세울 수 없으므로 

슛이 진행되지 않을 땐,  차량들을 통과시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만 민간인들의 교통 민원으로 인한 부차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전기에서 '슛'과 '컷'소리를 해 줘야 거기에 맞춰 차량의 통제를 진행할 수 있기에,

나는 여러 대의 차를 막아놓고는 '컷' 소리가 들리길 고대하고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슛', 촬영이 끝나면 '컷 오케이'를 외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무전기는 조용하기만 하고, 앞서 서 있는 차량들을 보니 내가 다 초조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전기에다 대고 "차량들 올려 보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짜증 섞인 소리.


"누가 슛 돌아가는 데 무전 치니!!"


아,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3. 내가 니 시다바리가


촬영이 생방송처럼 타이트하게 이뤄지는 때면, 제작부의 일은 더욱더 많아진다.

현장의 촬영이 바빠지는 것도 있지만, 생방송처럼 찍는 시즌에는 스태프들의 피로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흔히 제작부는 감독들의 커피를 사다 주는 역할도 항상 겸하게 된다.

현장의 연출자마다 성향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현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근처 카페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연출자부터, 촬영감독, 조명감독, 동시 기사, 장비기사 등의 커피를 산다.

조금 더 피로한 날이다 싶으면, 

연출부, 스크립터의 커피도 사고, 현장에 필요한 요직들의 커피까지 전담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한 번에 들고 오는 커피 잔수는 최소 8잔부터 최대 20잔이 넘는 때도 있다.


문제는, 이런 커피 심부름(!)이 제작부에게 너무 당연하게 자리 잡다 보니,

직급이 조금 높은 포지션의 경우 너무 당연하게 커피 심부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하루 세 끼씩이나.

(야간 촬영이 있으면 하루 네 번, 그 이상도 더 할 때도 많다.)


커피 심부름만 하면 다행이다.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시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혹은 드라마 현장의 성교육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기 전에는, 

남자 어르신들의 경우 어린 여자 스태프에게 아재 st. 의 성적 농담을 하거나 쓸데없는 스킨십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요새는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경우나, 스킨십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드라마 현장에 처음 발령받던 초반의 이야기다.)


어떤 날은 화장실이 막혔다는 비보를 접한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이소에서 뚫어뻥을 사다가 남이 치른 곤욕(!)을 열심히 뚫은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길가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 오만 개비를 주운 날도 있었다. (참고로 나는 비흡연자다.)

어떤 날은 감독이, (연출부가) 피곤해서 식사시간에 자겠다고, 식사 대신 먹을 만한 밥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스태프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어떤 스태프가 자기 물건을 놓고 왔다며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전날 감독이 술을 많이 마셨다며 숙취해소제를 사다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촬영장 옆에 개가 많이 짖어서, 개를 잠재울 개껌을 사다 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현장에서의 제작부의 삶은, 그야말로 전천후 '시다바리'가 아닐 수 없다.



제작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다소 늘어놓긴 했지만,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부를 놓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이 현장이 좋고,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이 공간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그리고 드라마 현장에도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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