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뜰 Jun 14. 2018

나의 작은 가게, 부엌을 열고 닫으며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전업주부를 검색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포스트가 '대출'입니다. 전업주부 대출, 전업주부 재산 분할, 전업주부 연봉 등등 제가 알고 싶어 하는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 그 곳을 메우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왜인지 모르게 기분이 나빴지만 천천히 들여다 보고 있으니 뭔가 알 것도 같습니다. 주부에게 돈은 반드시 필요한 생존 전략이고 그것을 정정당당하게 얻어낸다는게 어려운 일임을요. 그래서 우리는 이곳저곳 얕고 깊은 지식을 서로 빌리고 나누며 급할 땐 어쩔 수 없이 대출의 힘이라도 빌려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른의 나이, 한창 조직 생활에 몸담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시기에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저는 경제적 가치와 심리적 안정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고스란히 1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있어도 될까? 남편에게 너무 무거운 가장의 짐을 지우진 않았나? 나 편하자고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나?” 별별 생각을 다하며 부지런히 주부라는 단어에 갇힌 어떤 이미지를 지웠다 다시 세워 봅니다.


다양한 글에서 나름 주부의 정의를 재정비해갈 무렵 마치 집안일은 1인 창업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말하는 '놀고 먹는 팔자 편한 주부'는 정말 집에 가사 도우미님도 계시고, 내 전용 자동차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카드를 시원하게 긁을 수 있을때나 가능한 말일뿐, 저처럼 겨우 굶지 않고 1~2만원짜리 쇼핑을 한 달에 2번 정도 할 수준의 외벌이라면 그 외 나머지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저와 배우자의 의무입니다. 즉, 어떠한 방식으로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자본주의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노동자라는 이야기지요.





아침 6시 50분에 일어나 남편 출근 준비를 돕는 것을 시작으로 저의 1인 가게도 문을 엽니다. 주방 불을 켜고 냉장고를 열어 전날 얼려 두었던 과일들을 믹서기에 갈고, 컵에 따라 저어 마실 수 있도록 젓가락 하나도 야무지게 챙겨 놓습니다. 그런 다음 전날 설거지 해두었던 밥그릇, 반찬그릇, 냄비, 후라이팬을 각자의 자리에 꼼꼼히 넣어 놓은 뒤 거실로 나가 어질러져 있는 쿠션을 정리하고 테이블 위 소란했던 것들을 치웁니다. 남편이 출근한 자리에 남아 있는 주스 컵을 마저 씻고 잠옷, 이불을 정리하면 잠시 소파에 앉을 수 있습니다. 별일 한게 없는데도 금세 배는 고파지고 이른 아침을 9시경에 차려 먹는데 어쩔 때는 정성스레 반찬과 밥을 해서 먹기도 하고, 귀찮은 날엔 빵 한 조각에 쨈을 바르거나 좋아하는 떡라면을 끓여 먹기도 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필라테스 운동을 갑니다. 1시간 뻘뻘 땀을 흘리고 오면 라디오를 블루투스에 연결하면서 청소기부터 집어 들어 집 안의 먼지를 빨아 들이고 삼일에 한 번씩 하는 물걸레 청소까지 마칩니다. 마치 전장에 나가기 전 용맹한 군사처럼 콧바람을 씩씩거리며 청소를 끝내지요. 별반 달라진게 없어보이는 집이라도 마음만은 개운하고 몸을 움직였다는 성취감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만두 몇 개 쪄서 허기를 달래면 오후 시간 시작입니다. 돈을 내고 찾아오는 손님은 없지만 저의 가게는 바삐 돌아가죠. 부엌 옆 아일랜드에 앉아 틈틈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를 2시간 정도 하고 저녁 반찬 메뉴를 생각합니다. 때에 따라 장을 봐 오기도 하고 시간이 좀 더 주어지면 은행일을 보거나 집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는, 나름 바쁜 일정을 소화합니다. 저녁을 먹고 치우는 과정 속에서도 앉아 있는 시간보다 발을 종종 굴리며 다니기 바쁘지만 이곳이 나의 일터라고 마음을 먹으면 뭐라도 하나 더 신경쓰고 싶습니다.


일 잘하는 직장인,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 효율적으로 보고서 쓰기, 회계하는 이대리 등 자기계발서류의 책제목은 결코 회사원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집안일에서도 우선 순위는 존재하고 어떻게 동선을 효율적으로 잡을지 고민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새로운 반찬거리는 창의력을 요하기도 하고 저축과 소비 균형을 잡는 잡다한 회계 지식도 필요하거든요. 가만 들여다 보면 ‘일’을 잘 해내고 싶단 마음이 주부인 지금도 절실합니다. 봐도 봐도 나왔던 오탈자에 한숨을 그득 쉬었던 과거의 제가 지금은 다른 ‘일’을 잘 해내고 싶어 욕심을 부려 봅니다. 적은 돈으로 집을 단정하게 꾸며 sns에 마케팅을 하기도 하고 블로그에 기획서처럼 하루 일과를 정리하기도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소홀해도 흐트러질 수 있는 집안일에 ‘전문직’을 보태면 1인 창업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공간을 잘 지키기 위해 밤낮없이 고민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작은 가게 사장님처럼 저도 이곳을 좋아하는 공간으로 직접 만드는 기적을 이루고 싶습니다. 그럴려면 무수한 노력이 필요할테지요.



[마케터의 일]


마케팅을 잘하려면 마케팅 이전에 일단 그냥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은 메일 쓰는 것만 봐도 알아요. 받는 사람이 회의가 많으니 메일 확인은 스마트폰으로 하겠지? 긴 글은 읽을 여유가 없을테니 짧게 써야겠다. 하나의 메일로는 하나의 이야기만 해야겠다. 워드나 엑셀같음 첨부파일은 내용 보기 어려울테니 캡처 이미지로 본문에 넣고 PDF로 변환해서 첨부해야겠다....

이런 건 센스를 타고나지 않아도 상대를 관심있게 보고 상상하면 할 수 있는 생각들입니다.




그냥 일을 잘해야 한다는 말에 뒤통수가 따끔거립니다. 유독 일을 못했던 정기자 시절의 무수한 경험들이 아직도 이불킥을 차게 하지만 홀로 일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실수들이 현재의 저를 계속 나아가게 합니다. 한 번 생각할 일을 두 번 하게 하고 그 속의 잘못된 점을 수정하게 하는 반복적인 일들이 살림살이를 부풀고 정돈하는데 쓰입니다. 전세계약, 장기충당수선금, 아파트투유 등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기본 일을 잘하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죠.


그런 믿음으로 저는 여전히 저만의 부엌을 열고 닫으며 일에 대한 욕심을 키우고 언젠가 다시 맞벌이로 나갈 준비를 합니다. 경력 단절의 주부는 억세고 드세고 자기밖에 모른다며 은근 무시하는 세상에 부드럽게 융화되어 저만의 방법으로 씩씩하게 적응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가 지금 있는 이 자리의 일을 잘 해내야겠죠? 때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꾹 붙잡고 매일 부엌을 열고 닫으며 제가 정해 놓은 규율을 깨뜨리지 않게 노력합니다. 이곳을 잘 지키는 게 지금 나의 ‘일’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나만의 만트라 적어두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