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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뜰 Sep 23. 2019

어차피 알려줘도 안 할 사람은 안 해요.

살림, 문장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좋아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즐겨 보는 편이었지만 유독 애정이 컸던 건 우먼 파워가 느껴지는, 여성이 주체적으로 일을 주도하는 드라마였다. 요즘 90년 대생들은 모를 99년도에 나온 드라마 '퀸'은 프로그램 소개부터 '커리어우먼들의 일과 사랑을 코믹하게 그린 드라마'라고 나와 있는데 나는 무려 이걸 보면서 어서 어른이 되어 회사를 다니는 멋진 여성이 되고픈 꿈을 꿨다.(왜 그랬어..) 문제집을 풀 때도 마치 기획서를 작성하는 커리어우먼처럼 온갖 도도한 척은 다 했던 꼬꼬마 시절 이야기다.


 드라마를 좋아했던 이유는 놀 것 다 놀면서도 될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는 무조건 해피앤딩 구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분간 주인공의 노력이 화면에 비치면 커리어우먼은 승진도 하고 멋진 남자와 연애도 하면서 끝이 났으니까..


 그런 걸 보며 자란 나는 드라마와 현실도 구분 못하고 쫌만 노력하면 뭐든 다 잘 될 줄 알았다. 공부도 적당히, 놀기도 적당히, 사실 대충대충 하면 적당히 괜찮은 인생을 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엔 편집이 없는 법. 힘들고 찌질한데다가 노력한 만큼 결과도 나오지 않은 수많은 b컷은 모두 라이브였다. 모자이크 처리를 한다거나 예쁜 장면만 골라 인생을 맘대로 편집하지 못하고 오로지 1인칭 시점에서 주인공도 됐다가, 조연도 됐다가(비중은 훨씬 크다.) 낑낑대며 다큐멘터리 인생극장 필름을 틀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이제는 드라마가 별로 끌리지 않는다. 짜고 친 고스톱 같은 극본이 내 인생에 있을 리 만무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어쩐지 모든 일이 어렵게 보여도 결국 쉽게 쉽게 풀리는 연출 상황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신 평범한 사람의 묵묵한 행동이 가슴에 닿는 프로그램이 점점 좋아지는데, 그중 하나가 <생활의 달인>이다. 나는 이 프로그램이 좋은 점을 취업 자소서에도 응용해 써넣었을 정도로 좋아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어떻게 단순 반복적인 일을 수십 년째 할 수 있을까?'이고(난 절대 못할 것 같다!!), '고작 3,000원짜리 떡볶이에 저런 수많은 과정이 담겨야 할까?'의 의아함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해내는 성실함이
궁금하다.


 전자는 상자 접기 부업 달인을 보며 느꼈던 거고, 후자는 작은 분식집에서 만드는 떡볶이 제조법을 보며 든 생각이다. 양념장을 만들기 위해 새우와 오징어를 손질하고 그걸 쪄서 가루를 내고, 직접 담근 간장을 또 넣고 잡내를 빼기 위해 메밀국수를 이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수십 년을 해오고 있는지 내 상식으로는 감히 알 수가 없다. 무한 반복 탁탁탁 상자 접는 일을 하루 8시간씩, 365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걸까?


이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성실하다는 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지?


부끄럽지만 나는 게으름과 대충을 모토로 살았다. 실패가 두려워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어차피 열심히 안 했으니 실패해도 괜찮다는 마인드를 머리에 새겼다.



욕심 없는 척하는 게 일상이었어.
상처 받고 싶지 않아서 괜히 괜찮은 척을 했어. 그게 내 자존심이었는데 말이야.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천하의 성유리도 저런 고민을 했다는 게 묘하게 신기했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더 뜨끔했는지도 모르겠다. 욕심 내어 뭔가를 실컷 해보기도 전에 실패하는 게 두려워 자꾸만 핑곗거리를 늘렸다. ‘그까짓 껏 안 돼도 그만’이라고 먼저 선을 그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창피했던 거다.


 나는 실패도 없고, 그렇다고 성취도 없는 삶을 만들어갔다.


 뚜렷한 계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대로 살다 간 안 되겠다 싶었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가 두려워 내 인생을 대충 살아가는 건 확실히 잘못된 거니까.. 그래서 살림 일지부터 시작했다.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해야 할 일을 공책에 하나씩 적고 체크리스트 지우듯 성실하게 사는 걸 연습했다. 하루쯤 게을러도 싶었지만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쓸고, 닦고, 적성에 없는 요리도 해가며 내가 서 있는 환경에서 묵묵히 일했다.


 전업주부라는 자리가 쓸쓸할까 봐 재택 아르바이트도 시작하고 살림과 일의 균형을 맞춰 가며 열심히 살았던 시절. 날 좋고 놀러 가고 싶은 날에도 꿋꿋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세탁이 다 된 빨래를 건조대에 하나씩 널면서 일상을 수행하듯 지냈다. 일종의 정말 도 닦는 시간이었다.


 1년, 2년, 3년이 되니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느껴지고, 생활에 밀접해질수록 성실하지 않으면 어디서나 살아 남기 힘든 걸 깨달으며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즈음 하기 싫어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이 행동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으면 시시한 일, 재미없는 일, 아예 어려워 보이는 일은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했지만 '뭐 어때, 해보기나 하지'라는 개념이 생기니 몸이 움직인다. 욕심 없는 척이 내 자존심이었지만 이제는 욕심부린 일이 잘 안 돼도 별로 기죽지 않는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했으나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그만이라고 선을 긋는다. 물론 크게 욕심부려 보고 싶은 일엔 어떤 형태로든 노력하며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로또 1등도 일단 로또를 사야 가능한 거니까.


 인생에 드라마 따위는 없다. '정직•최선•노력 • 성실' 정말이지 이 고리타분한 단어는 인생의 모든 장면을 작아도 위대하게 만들 특수효과다. 특별한 운과 기회도 드라마에서나 생길 뿐, 그저 우리는 매일 편집 없는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정직한 장면을 이어 붙여야만 한다.


 <생활의 달인> 속 사람들이 좋은 이유는 타인이 열심히 사는 걸 보면 나도 힘이 나서였다. 다들 제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는 걸 볼 때 이토록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내 노력과 성실함밖에 없다는 걸 그들이 몸소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내 손이 발견한 것들에게 힘을 다해 정성을 쏟아 보고 싶다. 삶을 애정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뭐라도 하면 뭐라도 되는 게 인생의 이치니까. 게을러도 될 시기가 있고, 반대로 이 악물고 열심히 해야 할 시기도 있다. 그저 귀찮아서 혹은 결과가 안 좋을 거란 핑계 뒤로 숨지 말고 내가 얼마큼 뛰어볼 수 있을지 일단 걸어보자. 결국 이 모든 시도는 내 삶에 벌어진 어떤 커다란 일을 묵묵히 감내할 힘이 되어 줄 것이기에.


 "에라 모르겠다. 최선이나 다 해야지"

이 문장이 얼굴에 보이는 사람이 있다. 정말로 멋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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