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형 Apr 29. 2019

러브레터, 우리 500일

그녀에게 쓴 편지

  1.

  오월이 바로 코 앞에, 그녀와 내가 손을 잡고 있는 오늘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2019년의 일월을 맞았던 기억도 없는데 오월이라니. 아마 시간을 건너뛰었거나 누군가 질 나쁜 농담을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봐, 오월이야. 올해도 삼 분의 이 밖에 남지 않았다, 이 말이야. 생각해봐, 친구. 이런 날이 딱 두 번만 더 반복되면 2020년이 되는 거야. 그때가 되면 나는 또 멍청한 표정을 한 네게 얘기해 줄 수 있을 거야. '이봐, 오월이 됐어.'"

  

  생각해보니 난 분명히 일월을 맞이한 기억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같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제야의 종이 울리는 것에 맞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그녀는 귀여운 표정으로 내 옆에 얌전히 앉아 기도를 따라 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그리고 내 옆의 이 귀여운 사람이 언제고 내 곁에 있기를 바랬고 그래서 그 기원을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아무튼 2019년 일월 일일을 맞이했던 순간은 초록의 덤불에 핀 장미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그러니까 벌써 오월이라는 놀라움은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재밌고 행복해서 그만 쏜살같이 시간이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을 알려줄까?

  

  오늘은 우리의 오백일 째 되는 날이다.

  


  2.

  백이면 백,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물어보고 같은 대답을 듣고 난 뒤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암.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구먼, 그래.

  

  "500일 동안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누구의 덕입니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녀 덕분입니다."

  

  그녀는 예쁜이다운 미모와 한결같은 잔망과 소소한 질투, 땡깡, 투정, 말 안들음으로 강철 같은 매력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단단하게 구축한 그녀의 매력은 500일 동안 조금도 퇴색되거나 변색되는 것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히려 익숙해지면 질수록 좀 더 날카롭게 날을 세우듯 내 마음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5,000일과 50,000일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그녀에게 홀린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500일 동안 버림받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간당간당해 보이던데요?"

  

  사람들이 묻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대답을 기다렸다.

  


  3.

  일순간 감도는 정적을 바라보며 뜸을 들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민하는 듯했지만 답은 이미 입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자비나 나의 운 때문이 아니라 그럴 운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헐벗었던 나무가 여름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짙푸른 색으로 무성해지듯이. 그녀를 만난 나는 그렇게 결정되었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고.

  

  "우리는 시절 인연 이니까요."

  

  알듯 말 듯 아리송한 표정들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은 좀 더 질문을 할 기세였다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나 행복해하는 남자에게 대답을 기대할 필요가 있겠냐는 깨달음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오백일을 맞은 남자에게

  사람들이 몰려와서 묻다.

  기쁘냐고.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이 빨대와 북극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