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더 잃을 수도, 혹은 길을 찾아갈 수도
- 유산은 여성에게 매우 감정적인 경험이며, 충격을 심하게 받을 수 있고,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움을 준다. 실수로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조차도 스스로 상당히 실망하고 공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죄책감과 분노도 동반될 수 있다. 불안 자체로도 유산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므로, 불안이 다음 임신에 영향을 주지 않게 유산 후 경험하는 감정들을 잘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로 간주되는 측면이 아직도 있고, 친구들은 선의에서 ‘아기에게 문제가 있었을 거야’ ‘이런 일은 늘 일어나. 차라리 늦게 겪지 않아 다행인 거야’ 등의 이야기로 당신의 경험을 작게 만들려고 할 것이며 이런 말들이 경험을 서로 나누기보다는 주제를 말로 꺼내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당신이 스스로 느끼는 느낌을 알아가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경험하는 감정적인 어려움을 이해하고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이런(생략) 단체들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다 -
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로마테라피에 대한 원서를 뒤적이다가, 병명과 상황 별로 아로마테라피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적혀있어 쭉 훑어보는 중이었다. 눈길이 가는 대목은 역시 내가 경험한 부분들. 그러다 우연히 '유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되어있는 부분을 읽게 되었다. 처음 읽어보는 설명에 나는 너무나 놀랐고, 예상치 못한 책이 해주는 공감에 갑작스레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유산을 두 번 경험했다. 한 번은 다량의 출혈과 함께 눈물로 작별인사를 하고 집에서, 한 번은 분만실 병실에 입원해서 진통하며 떠나보냈다. 그렇게 그 일들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동안 유산에 대해 누구도 저렇게 얘기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트라우마까지 발생시킬 수 있는 그런 고통스럽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그리고 죄책감과 분노, 깊은 실망과 공허감을 남기는 경험이라는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해준 적이 없었고, 당연히 공감도 거의 없었다.
다만 거의 모두가 위로해주려는 좋은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별것 아니야, 또 가지면 되지,
요즘 다들 한 두 번은 겪더라, 그냥 잊어.
유산 후에 바로 임신 시도하면
더 애가 잘 생긴다던데
유산 한지 얼마 안 되어 한약을 먹고 몸 회복에 신경 쓰고 있는 시기에 들은 이 말. 생각지 못한 말에 깜짝 놀란 나와 신랑이 ‘몸을 회복하는 게 먼저’라고 하자,
으이그 네 몸이 약해서...
라는 말이 이어졌다.
무슨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단 한 번도 나와 유산 이후 심정에 대해 따뜻한 대화 한마디 한 적이 없는 어느 분과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더 그래서 서운했던 것 같다. 거기에 더해 초기 유산은 산모 탓이 아니라 태아가 애초에 약했던 탓이라는 것이 정설인데, 그저 네 몸이 약해서라고까지 정의내리는 것이 무례하게도 느껴졌다.
본인도 두 번이나 겪었다고 말하던 친구는 첫 번째 유산을 한 내게
난 애초에 약한 애들이니
둘 다 차라리 잘 떨어졌다고 생각했어.
너도 그렇게 이겨내야 돼!
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친구의 의도는 멈춰 있지 말고 이제는 극복하라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친구들과의 식사 모임에서 앞뒤 맥락이 없이 나온 그 말은 나에게 그저 폭력이었고 겨우겨우 가까스로 흘려보냈던 말이었다. 당황해서 나는 별다른 말도 못 하고 그저 내 유산의 과정이 많이 힘들었음을 갑작스레 조금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의 충격이 오래 남았던지 그 친구의 말은 두 번째로 유산을 하고 나서 멍하게 앉아있던 내 귓가에서 다시금 오래도록 여러 번 울려 퍼졌다.
‘나는 이제 두 번 유산을 했는데, 나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데, 어떻게 잘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병원에서도 유산은 요즘 흔한 일이라며, 별 것 아니라며, 두 번은 뭐 걱정할 것도 없다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심적 어려움을 느끼면 상담을 꼭 해보라던가, 그런 조언은 병원에서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모두가 선의로 한 말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을 수 있듯, 그들의 말은 내 상처에 돌처럼 박혔다. 내 몸에 있던 생명의 심장이 하루하루 점점 느리게 뛰다가 마지막에는 심장이 거의 멎은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경험이었고, 그 생명이 그렇게 내 몸 안에서 죽은 것이었고, 산모들이 많은 분만실 옆 병실에서 약을 투여하고 진통을 하며 계류 유산된 태아를 배출해야 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나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인정해야 하는 나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일상 속 모두의 언어 속에서 나의 유산 경험은 작아져야 하는 경험이었고, 언급되는 것이 꺼려지는 경험이었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혼자 스스로 회복해야 하는 경험이었다. 사람이 죽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내 귀에 들려오는 언어 속에서의 유산은 그저 '별 것 아닌 경험'이었다.
나 역시 때로는 지인에게는 솔직하게 감정을 얘기한 적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배려하느라 스스로가 요즘은 괜찮다며 별 것 아닌 척 억지로 작게 만드는 대화를 해야 했던 적도 많았다.
스스로의 경험을 인정하기 어렵고, 경험을 말할 때 왜곡해야 하는 상황 안에 있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또다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빨리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위로를 한다며 자기 계발 및 심리학 서적을 인용하며 '노오력'이 부족하다는 어조를 섞어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게 언젠데 아직도 그래?
감정을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야.
네가 놓아버려야지!’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이고 모두가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나도 내가 경험하기 전에는 얼마나 이런 일들을 겪은 이들의 상황에 무지했던가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반성하고 반성한다. 그래서 SNS에 이런 경험을 적는 것조차 많이 꺼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번은 적고 싶었다. 주위에 있는 유산을 겪은 사람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적인 상담 등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살펴줄 공감의 기회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대화 안에서 당신이 그 경험을 억지로 작게 만든다고 해서, 그들의 경험이 결코 없었던 일이 되거나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건 당신의 바람을 가장한 폭력일 뿐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본인의 바람을 그렇게 전달하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겪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요즘은 어떤지, 존중하면서 물어봐주는 것이 아닐까.
위의 대화들의 공통점은 그런 물음이 전혀 없이 일방적으로 본인들의 말만 나에게 남기고 떠났다는 점이었다.
그 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도 당연하다.
그냥 누군가 따뜻하게 물어봐주고 이야기해주고 공감해주며 안아줬으면.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