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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May 27. 2019

쉬는 데에도 이유가 정해진 사회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봐요





퇴사 후에도 종종 헤드헌터들에게서 새로운 포지션이 오픈되었으니 지원할 생각이 없는지 연락이 왔다.


지금 퇴사 후 쉬고 있으며 어디에도 지원하지 않았고

구직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면,

돌아오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아, 육아 중이세요?’

‘아뇨. 아이는 없습니다’

‘아, 아니세요? 그럼 저 왜 쉬고 계신 건지...’

‘10년 넘게 쉬지 않고 회사를 다녀서 조금 쉬고 싶어서요’

‘음...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네 건강해요’


(일면식도 없는 헤드헌터에게 유산을 여러 번 겪으며 번아웃이 왔고 휴식이 필요했다는 구구한 설명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너머의 무언가 갸웃갸웃하는 느낌.

그때 다시금 깨달았다. 사실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건...

내가 아무리 절실한 이유로 쉬고 싶었더라도

쉬는 것에도 사람들이 납득할만한 이유는 정해져 있구나.

이 사회에서 30대 후반 일하는 여성이, 경력을 이어갈 것이라면 쉬어도 되는 이유란 오로지 ‘육아’뿐이고 그것만이 그 나이 때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이구나.  


아파서 쉬고 있어도 아웃이고

그냥 놀고 있다고 해도 반은 끄덕끄덕하지만 반은 갸웃갸웃.

구직을 계속하는데 진행이 잘 안돼서 쉬고 있다는 것이면 더 좋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참 뒤 또다시 어느 헤드헌터 분이 연락을 주셔서 통화를 했다. 좀 더 자세한 회사 정보라던가 조직 분위기 같은 의례적인 얘기를 하다가, 사실 현재 쉬고 있고 전혀 구직 중이지 않은데 연락을 주셔서 고민하게 된다고, 입사지원을 하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큰 결심이 필요해서 좀 망설여진다고 이야기했다.


그분도 휴식을 하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잠시 머뭇하다가, 의도한 것은 아닌데 이번에는 휴식의 의미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앞서 유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시간 동안 잘 이해받지 못했던 기분을 또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헤드헌터들의 연락을 받지 않기도 했었는데, 뭔가 이해받거나 납득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이번에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해보았다.


‘재직 중에 유산을 두 번 해서요...’


그런데 내 생각과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는 아마도 나의 상황을 여러 면에서 잘 이해받지 못했던 경험 때문이었는지 혼자 먼저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다 나를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때로는 그런 상황을 경험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을 때도 많다.

저 사람이 나의 아픔을 듣고도 무심하게 이해 안된다는 투로 이야기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럴까봐. 그래서 또 상처 받을 까봐.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이번에는 달랐다.


어머.. 저도 두 번 그랬어요.


라는 대답이 들려왔고 나도 모르게 빗장이 풀려서

 ‘어머... 저도 두 번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부터 드러내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뭔가 숨겨놓다가 물꼬가 트여야만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 같다. 심지어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어머 저도...

그래서 좀 더 마음 편한 회사로 이직하고 나서

아이를 낳았어요...'


그리고는 여성들의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서로의 당시 상황을 간략하게 나누었다.


나의 경우는 10년 넘게 공백 없이 일했고 퇴사 이유도 충분히 납득되는 사유라고, 충분히 지원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힘을 내라고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쉬다 보니 이런저런 기회를 보아도 자꾸 위축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니, 이 회사가 꼭 아니어도 자꾸 나와서 지원을 하면서 입을 떼야한다고 그럼 나아진다고 그 경력을 가지고 왜 그러냐고 격려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주위 사람에게도 때론 받기 어려웠던, 낯선 사람의 뜻밖의 공감에 뭔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도 나는 충고, 조언, 비난, 평가가 아닌 공감에 목이 말랐던 것 같다. 그렇게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도 해보고 한 군데는 지원도 해보았다. 포지션의 채용 자체가 미뤄지는 바람에 진행은 더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뭔가 시도를 했다는 것은 좋았다.


충분한 휴식에 그런 격려와 만남이 더해져, 조금씩 조금씩... 나의 상태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쉬면서 재충전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쉴 만큼 쉬어 충전이 되었는지 의욕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의욕을 새로운 어느 회사에서 써야 할지, 아니면 다른 어딘가에 쏟아야 할지는 ... 여전히 고민이 되고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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