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이사한 집은 낡은 구옥이다. 요즘은 구옥을 새롭게 꾸며 예쁘게 사는 사람들의 글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나도 그런 로망이 있었다. 사실 통장 잔고와 타협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하여튼 그런 글에서 소개하는 대부분의 집은 우리 집에 비하면 애교다. '고작 20년 된 집을 구옥이라고 한다고? 귀엽네. 피식.'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40살에 가까운 건물이다. 이 동네가 재개발을 추진 중이라, 철거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실제 철거까지는 앞으로 10년쯤 걸릴 거라고들 하지만). 그래서 부동산에선 내가 이 집을 계약하기로 했을 때 계약서 특약사항에 "임차인은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토를 달지 않고 나간다"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다니면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낡고 정돈되지 않은 동네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올라 어느새 하늘에 가까워져야 집에 도착하게 되는 마을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머금고 "누구 ♡ 누구"가 커다랗게 쓰여있다 빛이 바랜 담장, 계단 입구를 지키는 조각상, 골목에 늘어선 몇십 개쯤 되는 계단 때문에 우리 집 3층이 누군가에게는 지층이 되는 광경 같은 것들. 붉은 벽돌 위를 감싸고 있는 담쟁이는 이미 수십 년을 집과 공생한 탓에 이젠 건물 외벽에 새겨진 문신처럼 보인다.
나는 이런 동네 초입에 집을 구했다. 지하철로 출퇴근을 해야 하니 역에서 가까운 집, 최대한 덜 걷는 집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길이 얼마나 가파른 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두 번 오갈 때는 괜찮아 보였으므로. 하여간 그 덕에 이 집은 2층인데도 탁 트인 뷰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남쪽으로 난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서울의 하늘과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는 나무의 모습이 아름답다. 그리고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벽난로가 자리 잡고 있다. 오브제나 모양을 흉내 낸 콘솔 선반이 아닌 진짜 벽난로 말이다. 벽난로와 거실 창문이 자아내는 고즈넉한 분위기는 내가 이 집을 선택하게 된 커다란 이유 중 하나였다.
이사를 오겠다고 결심하고 계약서를 쓰러 갔을 때, 이 집의 명의자이자 나의 임대인인 주인 할머니는 원한다면 내 마음대로 집을 고쳐 써도 된다고 하셨다. 오래된 집을 매매해서 고쳐 쓰는 것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 나에겐 큰 프로젝트의 예습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여 흔쾌히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사를 들어올 때쯤엔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집을 고치는 데 고생을 했지만, 값진 경험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렇게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이제 딱 반년이 되었다. 거실 창문 앞에는 3층 높이쯤 되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땐 새빨갛게 물들어있던 나무가 어느덧 푸른 잎이 자욱해 한여름의 자비 없는 햇살을 가려주고 있다. 그리고 난 이 운치 있고 넓은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꾸미고 살고 있는 중이다. 통근시간도 그전보다 현저히 줄었는데, 여기서 오는 기쁨도 크다. 아파트에서 나온 불편한 부분은 시간이 메워주고 있다. 큰맘 먹고 거실에 마련한 (원목) 흔들의자에서 창밖을 보고 있노라면 노곤노곤해져 잠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안락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 난 수면 아래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작은 단독주택을 사고 꾸미고 살면서 여행객들을 맞으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의 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니 아마도 미친 짓일 거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단독주택을 가꾸는 삶은 그야말로 갓생이다. 퇴근 후 모든 시간을 집을 돌보는 데 써야 할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 LED가 아닌 형광등이 설치된 집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당연히 LED 일 거라고 생각한 거실과 방의 조명이 형광등인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LED 조명이 나온 지 오래되지 않았나? 집을 볼 때 정말 단 한순간도 이게 형광등일 거라는 의심을 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미련 없이 그 조명들을 모두 처분하고 LED 조명으로 교체했다. 몇 달에 한 번씩 전구를 갈고 싶지는 않았다. 세탁실은 당연히 별도로 없는데, 다행히 베란다에 하수관과 수도꼭지가 있어서 베란다 한쪽을 세탁실로 꾸밀 수 있었다. 다만 베란다에 온수관은 없어서 찬물로만 세탁을 할 수 있다. 빡세게 세탁조 청소를 하고 싶을 땐 따로 물을 끓여다 세탁기에 붓는다. 한파가 닥치는 한겨울에는 아마도 세탁기를 돌릴 수 없을 것 같다.
세면대의 수압이 약한 편인데, 이걸 보완하려고 세면대 필터를 달았더니 이제는 그 물줄기를 이기지 못해 하수구에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욕조에서도 한 번씩 물이 잘 안 내려간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 물을 충분히 쓰며 씻고 나면 욕조의 물이 다 내려간 뒤 욕조를 헹구기 위해 조금 기다려야 한다. 보통 나는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한 뒤 씻고서 출근을 위한 다른 준비를 마친 뒤에 다시 욕실로 가서 느릿느릿 물이 내려가며 흔적을 남긴 욕조를 다시 한번 닦아내고서야 출근한다.
하, 배수관도 오래되어 종종 녹물이 나온다. 특히나 욕조 쪽 수도관이 문제가 있는지 하루만 안 써도 눈에 띄게 누런 물을 3초쯤 쏟아낸다. 덕분에 세면대, 싱크대, 샤워기 모두 필터를 설치하고 사는데, 이 필터가 한 달을 채 못 가는 것 같다. 어쩌겠나, 내 피부로 고스란히 녹물을 받아낼 순 없으니 난 필터를 갈고 또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민하고 연약한 지복합성 트러블성 내 피부는 처음 이사하고 두어달 쯤 트러블을 달고 살았다. 오래된 집은 수돗물에 잔류 염소가 있다더니 그래서인가 보다. 머릿결도 전보다 상한 것 같고. 머리를 기르고 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끝이냐고? 그러면 구옥이 아니지. 집 주변에 나무가 많아 생각보다 벌레가 많이 있다. 여름이 되니 나무에 매달려 울어대던 매미들이 2~3주를 울어 제끼고 맞이한 최후의 흔적이 널려 있다. 안타깝지만 징그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비 온 다음 날엔 계단 발치에 지렁이가 꼭 나와 있어서 발 밑을 조심하며 내려가야 한다. 서울로 이사 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땐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연친화적인 풍경이다.
처음 인터넷을 이전 설치할 때 기사님께서 이 집이 참 예쁘고 좋은데 모기가 좀 있을 거라고 하셨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전 세입자가 어떤 사람인 지는 몰라도 벽에 모기를 잡고 치우지 않은 흔적이 많아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일이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지만 2주에 한 번 정도는 귓가에 울리는 윙윙대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대도시 고층 아파트(16층)에 살 때는 모기가 거기까지 올라오는 일이 없어 생각하지 않고 살던 일이다.
나에겐 모기보다는 날파리가 문제인데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오래된 배수구와 하수구에서 때때로 생기는 것 같다.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서 가끔 열매가 떨어져 날파리가 꼬이기도 하는데,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따라 들어오기도 하는 것 같다(모기도 물론). 내가 정말 싫어하는 벌레여서 전기 포충기를 밤마다 켜고 있다. 다행히 포충기의 효과가 좋아서 날파리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밤마다 한편에서 '타닥타닥'하며 포충기가 제 할 일을 하는 소리를 듣는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단단히 방어 태세를 갖추기 위해 벌레 차단 스프레이를 베란다 틈마다, 그리고 창문마다 뿌려두었다. 길면 6개월까지 효과가 간다고 하는데 효과가 있는지 아직은 아주 작은 거미 정도가 집에 들어올 뿐이다. 내가 이런 약들을 이고 지고 살게 될 줄은 몰랐다.
한 번은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고 있었다. 다 먹고 치운 그릇 하나를 후다닥 헹구려는데 이 차갑고 촉촉한 기분은 뭐지? 자세히 보니 싱크대 수전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 하나가 물총처럼 내 얼굴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친구들이 있는데 갑자기 뜯어보기도 뭣해서 우선 아무 일도 없는 척 자리로 돌아갔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 허겁지겁 테프론 테이프로 우선 구멍을 막고 간단히 치우고 일단 잤다. 다음날 설거지를 마저 하려는데 어제보다 더 물줄기의 수가 더 많아졌다. 하아.. 이 집, 또 시작이다. 일단 사안이 급하고 테프론 테이프는 다 써서 이번엔 남은 전기테이프로 구멍 난 곳을 막아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틈이란 틈으로 모두 물줄기가 삐져나오며 스프링클러가 되어 가는 통에 그다음 날까지 난 싱크대를 못 쓰고 살았다.
그날 밤엔 싱크대 수전에 대해 한참을 검색하다 폰을 손에 쥔 채 잠들었다. 눈뜨자마자 쿠팡에서 똑같이 생긴 코브라 수전을 주문했고, 하루가 더 지나 배송 온 수전을 설치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어느 날 엄마랑 통화하다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이사하면서 수리를 많이 하더니 싱크대 수전은 안 바꿨나 보네? 그거 되게 오래 쓰면 그럴 때 있어."라는 것이다. 나는 살면서 수전에 구멍이 나는 집은 처음 봤다. 이 수전은 얼마나 오래 일한 걸까?
구옥에 사는 일은 매력적이다. 사진을 보고 남들의 글을 보면 더 그렇다. 난 모든 집, 모든 사람이 같은 구조로 살고 있는 아파트나 오피스텔은 왠지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또 그 때문에 정감 가득한 이 집으로 이사를 왔지만(물론 아파트는 비싸서 가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감수할 만한 건조함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내가 모르던 구옥의 세계가 이제는 또렷하게 보인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근시였던 내 눈에 안경을 올린 것처럼 그동안은 잘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세세하게 보이고 그려진다. 그리고 그 덕에 또 다른 대륙으로 여행을 하는 것처럼 내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 미우나 고우나 내가 골라 적어도 2년은, 남은 1년 반은 더 살아야 하는 집. 난 이 집에 사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선택해야 한다.
#뚝딱대는구옥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