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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없다. 단지 스승을 만드는 제자가 있을 뿐

- 우치다 타츠루 ‘스승은 있다’ 소감문



'매운 여귀 잎을 먹는 벌레도 제 멋이다.

매운 여귀 잎은 대부분 벌레들이 싫어해도 이 여귀 잎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벌레도 있다.’

  - 우치다 타츠루 <스승은 있다> 중에서      


                                                                                                글쓴이 / 인문학연구소공감 김광영

 

1. 서론

    

  우치다선생의 이 재밌는 책을 누워서 들고 읽다가, 그다음에는 바로 누워 읽고, 나중에는 책상 위에서 올바른 자세로 읽게 되었다. 가벼운 일화로 연결된 쉬운 이야기들 같지만, 그 속에 스승과 제자의 관점을 뒤집어 보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들어있다. 어렵게 수식된 현란한 말로가 아니라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눈이 책에 있다.

  초한지의 한나라 지략가 장량과 어떤 노인의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장식되는데, 노인은 단지 신발을 던져 놓을 뿐 아무런 가르침이나 교훈을 말로 하지 않는다. 장량이 그 노인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속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큰 스승으로 존경하게 된다. ‘스승은 과연 있는가?’를 질문하며, ‘스승은 있다’고 답하게 된 그의 논리를 역 추적해 본다.  


    

2. 본론     


  한마디로 표현하면 ‘제 눈에 안경’인 셈이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스승은 드물어도 내가 존경할 만한 스승은 있다는 말일게다. 최근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Whiplash(채찍)'를 보며, 우치다선생의 책을 떠올려 본다.

  영화에서 무명의 드러머를 카네기 홀에 세워 쪽팔림 당하게 만드는 황당한 지휘자의 모습이 나온다. 플렛처교수는 제자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악명 높은 지휘자. 혹독하게 제자들을 갈아치우며 최고 기량의 연주자만 남기는 무지막지한 교사다. 하지만, 주인공 앤드류에게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다 끌어내게 만드는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되고 있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혼자 드럼을 연습하는 앤드류의 드럼소리가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카네기홀에서 신들린 경지에 올라 광기 서린 드럼연주로 오케스트라의 정점에 서 있는 드럼연주 소리에 플렛처 교수 얼굴의 눈과 마주치는 앤드류의 눈빛으로 끝난다. 영화에서 '선생이 던진 쟁반이 없었다면 버디 리치와 같은 위대한 드러머는 나오지 않았으리라'는 반복되는 문구는 어떤 사람으로 스승으로 만나는 가보다, 역경을 극복하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제자의 태도가 더 중요함을 말해준다.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고, 가치 없는 말은 '그만하면 잘했어'야. 난 한계를 넘는 걸 보고 싶었어. 내 제자 중에 제2의 파커는 없었어" (영화 대사 중)     

   '반면교사'론이 책에 제시된다. 이는 '시시한 선생님' 혹은 '악독한 선생님'도 때로 혁명적 교훈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아주 획기적이었다. 좋은 스승을 찾아 헤매기보다, 현재의 스승 밑에서 자신의 최선을 끌어내는 동력만 발견하면 학생은 좋은 스승을 모시게 된다.      

  우치다 선생이 소위 콩깍지가 씌어 스승으로 모셨다는 레비나스(Levinas). 우치다 선생은 그의 가르침과 자신의 배움을 책 서문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저쪽에서 가르친 바가 없는 것을 이쪽이 배워버린다고 하는 일은 인간의 일신에 때때로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도, 내가 배워버린 것이 나의 내부에 기원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연히 외부로부터 나의 정신에 도래한 것이다. 그것은 역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여지가 없다.’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책에서, 우치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댄 대화’에 대한 교육적 가치를 논했다. 스승과 제자는 구전 속에서 서로 대화함으로 배움이 탄생한다. 일방적인 스승의 말에 대한 암기가 아닌, 제자의 적극적인 개입과 태도가 강조된 것이다.     

  레비나스는 2차 대전 시 독일군 포로로, 유태인의 죽음 경험했다. 그의 질문은 “ 1500년간 기독교 복음의 영향을 받은 유럽이 엄청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쟁의 폭력은 어디로부터 기인하는가?”였다. 그는 전쟁과 서양철학의 전통은 관계가 있다고 보았고, 전쟁은 전체에 대한 복종, 불복종자 무참한 제거가 전쟁의 속성으로 전쟁은 전체주의적이라고 본다.  

  서양철학은 대체로 하나의 이념으로 모든 것을 통일하고 포괄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파악한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 또는 전쟁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 주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했다.

  레비나스의 이런 추구가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 우치다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바로, 전체주의에 대한 항거와 개인의 가치 확인, 그리고 타자에 대한 책임.


  우치다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서문에서도 제자의 태도에 대해 소개한다.

  ‘지적 탐구는 늘 나는 무엇을 아는가가 아닌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으로 한 가지로 노력해 온 결과가 ‘무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그 노력을 그만두고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여 배우고자 노력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스승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질문이 없는데 대답하는 것은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관심이 없는데 들이미는 것은 언어적 폭력으로 비칠 수도 있다. 질문과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학습자의 몫이다. 스승의 역할은 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질문 속에 대답을 줄 스승을 찾게 되고, 그 관심은 경청(敬聽)으로 나타나 새로운 깨달음으로 진일보한다.      

  박동섭교수는 ‘나 또는 주체라는 존재는 애당초 있는 실체가 아니라, 어떤 관계망이나 특정한 활동 속에서 사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종의 행위나 사건 같은 것이라’고 마르크스와 비고츠키의 관점을 요약한다.

  바로 상황 속에서 관계 속에서 배움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체중심적인 사고에 대한 반성이다. 제자가 배울 그 무엇은 정형화된 틀 속에 갇힌 지식이 아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세상은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박동섭교수는 우치다의 <저잣거리의 독서론>을 인용하며, ‘교조와 사회과학은 범통성과 모든 역사적 상황에 보편타당한 진리일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대가로 잃는 것은 너무 많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마르크스도 시대의 아들이고, 그 민족과 역사의 특이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일게다. 우리에게 지식은 전수되어야 할 영원불변의 원리처럼 오해될 때, 수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는 학습의 의미를 탈주체화해서 관계 속에서 새롭게 해석할 것을 종용한다.

  우치다는 ‘레비나스의 관점은 주체는 결코 스스로는 자기 완결이나 홀로 완결할 수 없다는, 다시 말해 누군가 그리고 무엇과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모습을 갖춘다는 비고츠키의 관점과 절묘하게 공명한다.’고 보았다.     

  부산시에서  총 10개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었다. 유치원 1곳과 초등학교 6곳, 중학교 1곳, 고등학교 1곳, 특수학교 1곳이다. 경쟁보다는 협력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 시험과 대회를 과감히 없앴다.

  공교육의 획일적인 교육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학습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시도된 혁신학교는 학급당 25∼30명, 학년 당 5 학급 이내의 작은 학교 운영을 통해 교사와 학생들이 맞춤형 교육을 시행한다. 교사중심의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하고 배우는 능력을 신장하고자 함이다. 혁신학교에서는 또한 학부모의 참여도 중요해진다.

  과연, 이 시도가 어떤 반향을 불러올까? 사뭇 궁금해진다. 이제 막 씨를 뿌린 이 교육적 실험에 성급한 잣대질로 농사를 망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야말로 백년지대계가 아니런가?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을지라도 '스승은 있다'. 바로, 학습자의 태도가 좋은 스승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우치다 선생은 ‘스승은 없다. 단지 스승을 만드는 제자가 있을 뿐이다.’고 말하고 있다. 위플래쉬 영화에서처럼, 자신의 숨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로 혁신학교가 자리 잡으면 좋겠다. 외부의 강압적인 입시경쟁의 체제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가능성을 채찍질해 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3. 결론     


  우치다선생의 글에서처럼, 이미 답을 알아버리는 학생은 그 교사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나는 아테네라는 게으른 말에 붙어 있는 등에 같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산파술처럼 좋은 질문으로 삶을 자극하고, 계속해서 깨 물을 것이 있는 교사가 학생에게는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혹, 그런 교사가 없거나 만남이 쉽지 않다 해도, 학생스스로가 좋은 스승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우치다선생의 논리다.

  정보와 점수만 양산해 보는 통계중심의 판박이 교육적 틀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요즘 교육가들이 대안으로 떠들어대는 ‘창의력’ ‘인성’ 교육은 소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부산의 혁신교육 또한 그런 흉내나 말잔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이다.

  교육을 ‘나와 너’의 만남으로 집약한 철학자 마틴부버(Martin Buber)는 ‘강제적 주입식 교육’을 깔때기식 교육으로, ‘방종하며 풀어놓은 교육’을 펌프식 교육으로 표현하며, 깔때기식 교육의 한계점에서 펌프질로 개인의 역량을 끌어내는 교육관으로 쏠려지고 있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방향은 마치 새를 꽉 낀 새장에 가둬놓으면 자유와 창의성이 제한되고, 자연 속에 풀어놓기만 하면 방치된 무관심한 교육이 될 수 있지만, 인격적 신뢰 속에 적절한 관심과 긴장으로 교육할 수 있는 ‘포용교육론’을 내어 놓았다.

  ‘교사’는 있으나 ‘스승’이 사라져 가고, ‘학생’은 있으나 ‘제자’는 없어지는 시대. 위대한 제자들로 인해 위대한 스승들이 부산교육의 현장에서 나올 수 있으면 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과 얼굴을 맞대하는’ 얼굴이 있는 교육이 바로 스승과 제자를 만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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