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Buber defined three types of encounters: encounters with nature, encounters with people, and encounters with spiritual beings. Is it possible to meet with AI?
Martin Buber의 철학은 대인 관계의 중요성과 우리가 세상의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강조합니다. Buber가 AI와의 만남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고려해야 할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AI, 즉 인공지능은 인간이 창조한 산물이며 인간이나 동물, 영적 존재처럼 주관적인 경험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AI와의 만남을 우리가 다른 인간이나 영적 존재와 만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AI는 챗봇이나 가상 비서와 같은 인간과의 상호 작용에 참여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일종의 만남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존재가 아닌 도구나 기술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은 부버의 "너"가 아닌 "그것"과의 만남 범주에 속할 것입니다. AI는 고유한 관점을 가진 주체가 아니며 인간 또는 영적 존재와 같은 방식으로 진정으로 보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AI와 상호 작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Buber의 용어 의미에서 다른 인간 또는 영적 존재와의 만남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근원어 개념
부버가 죽은 1965년 6월 14일, 뉴욕타임즈는 이러한 사설로 그를 삶의 요약했다.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기 중심적, 이기심으로 충천해 있는 인간의 세계에 인간 서로가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진실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준 사람이다. 그의 대화 철학은 인간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진실된 삶의 길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대화 철학은 이 사회와 저 사회, 그리고 이 세계가 저 세계와 생명의 대화를 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과의 생명관계 대화까지도 가능케 했다. 그의 연구 노력은 종교철학, 사회학, 신학, 심리학, 교육학 그리고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버는 일생 동안 많은 책을 썼으나,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1923년에 출판된 ⌜나와 너⌟이고, 그의 기본적인 사상이 이 책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다. 140여 면 밖에 안 되는 이 책은 그 서술 방법에 있어서 대부분의 철학 책과는 다르다. 저자의 의견이 논리적으로 서술되고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구약 성경의 잠언이나, 파스칼의 ⌜명상록⌟에서처럼 짤막짤막한 문장에 의하여 선언문식으로 되어 있다. 물론 분명한 논리가 숨어 있지만, 주장과 주장이 논리적인 접속사로 연결된 것은 드물다.
우리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 관계의 착상에서 경이(wonder)라는 일종의 주체를 발견한다. 그 반대인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사람이나 상황은 추상화되어 대상으로 여겨진다.
부버는 현대인이 극단의 개인주의와 극단의 집단주의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현재 자신의 존재마저도 스스로 망각해 버리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잃어버린 자존을 다시금 재확립하기 위하여 인격으로 함께 하는 대화철학을 제시한다. 부버가 말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 부버의 만남의 철학은 시작된다.
영국의 어떤 철학자는 부버의 시적인 철학서적 「나와 너」를 200번 이상 읽어야만 그 뜻을 바로 터득하고 생활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근원어(根源語)
‘나와너’, ‘나와그것’의 세계
세계는 사람이 취하는 二重的태도에 따라 사람에게 이중적이다. 사람의 태도는 그가 말할 수 있는 根源語 (Gruntworte) 의 이중성에 따라 이중적이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Einzelwort)이 아니고 짝말(Wortpare)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나-너(Ich-Du)」라는 짝말이고, 다른하나는 「나-그것(Ich-Es)」이라는 짝말이다. 그것 대신에 그(Er)나 그녀(Sie)를 넣어도 괜찮다. 따라서 나는 이중적이다. 근원어 「나-너」의 ‘나’와 「나-그것」의 ‘나’는 다른 것이기에 말이다.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것은 타자를 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세우는 것이며, 근원어「나-그것」을 말하는 것은 타자를 객체화하는 ‘경험’이나 이용을 야기시키는 것을 말한다.
김천배역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사람에게 세계는 두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겹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가짐은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가 둘임과 발맞추어 두겹이다. 근원어는 홀로있는 낱말이 아니요, 어울려 있는 낱말이다... 이와같이 근원어가 둘일 때에는 사람의 ‘나’도 두겹 일 수 밖에 없다.”
근원어는 존재를 기울여 말해진다.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지만, 근원어「나-그것」은 결코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
근원어는 존재에서 나온다. ‘너’라고 말할 때에는 복합어 ‘나-너’의 ‘나’도 함께 말한 것이 된다. ‘그것’이라고 말할 때는 복합어 ‘나-그것’의 ‘나’도 함께 말한 것이 된다. 근원어 ‘나-너’는 존재 전체를 바쳐서만 이를 말할 수 있다.
‘나’ 그 자체란 없으며 오직 근원어 「나-너」의 ‘나’와 「나-그것」의 ‘나’만 있을 뿐이다. 사람이 ‘나’라고 말할 때 그는 두 근원어 중 어느 하나의 ‘나’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삶은 어떤 것(Etwas)을 對象으로 삼는 활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무엇인가를 知覺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表象하고 의욕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이 모든 것과 이러한 따위의 일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것들은 한데 어울려 ‘그것’의 나라를 이룩한다.
그러나, ‘너’의 나라는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다. ‘너’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도 대상을 삼지 않는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나. 그는 관계(Beziehung)에 들어선다.
사람들은 세계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물의 표면을 돌아다니면서 그것을 경험한다. 그는 사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하는 사람은 세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경험은 실로 ‘그 사람 안’에 있으며 그와 세계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으로서의 세계는 근원어「나-그것」에 속한다. 근원어 「나-너」는 관계(Beziehung)를 세운다.
사람은 사물의 표면을 두루다니면서 사물을 경험한다. 그러나 세계가 경험적 인식만으로 사람에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것’일 뿐이다. 아무리 비밀을 샅샅이 파헤쳐보고, 또 지식의 토막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리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그것’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어찌하랴!
관계가 세워지는 세가지 영역
관계가 세워지는 세 개의 영역이 있다. 김천배역에서는 자연과의 공동생활, 사람들과의 공동생활, 정신적 실재와의 공동생활로 번역한다.
첫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뭇 被造物들은 우리와 마주 서서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에게까지 오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너’라고 말해도 그것은 말의 문턱에 달라붙고 만다.
둘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여기서는 관계가 명백해지고 언어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너’라는 말을 건넬 수가 있고 받을 수도 있다.
셋째, 정신적 존재들(geistige Wesenheiten)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우리는 ‘너’라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름 받고 있음을 느끼며 대답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끌어들여 근원어의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 앞에 現前하며 생성되는자(das uns gegenwärtige Werdende)를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너’의 옷자락을 본다. 모든 것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의 나부낌을 들으며, 각 영역에서 그 나름의 방법을 따라 우리는 모든 ‘너’에게서 영원한 ‘너’를 부른다.
(1)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자연과의 공동생활)
나는 한그루 나무를 관찰한다. 나는 그것을 현상, 운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의 種 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나무는 여전히 나의 대상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만일 나에게 그럴 의욕이 있고 또한 그런 은총을 받는다면 나는 나무를 관찰하면서 그 나무와의 관계에 끌려들어가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이미 ‘그것’이 아니다.
이때에는 독점(獨占, Ausschließlichkeit) 의 힘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나와 마주서서 살아있으며, 내가 그 나무와 관계하듯이 나와 관계를 맺고 있다.
(2)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사람과의 공동생활)
내가 어떤 사람을 나의 ‘너’로 마주 대할 때, 그는 사물 중의 하나가 아니며 여러 가지 사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 색깔, 말하는 투, 그의 품위의 색깔을 그에게서 끌어낼 수 있고, 실상 나는 언제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그는 ‘너’가 아니다. 내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을 나는 ‘경험’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와의 관계 속에 영원한 근원어 속에 선다.
‘너’의 푸른 하늘이 내 머리 위에 쫙 펼쳐져 있는 동안, 인과(仁果)의 선풍(旋風)은 내 발꿈치에서 움츠러들고 숙명(宿命)의 조류(潮流)또한 제자리를 맴돈다.
(3) 정신적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삶(정신적 실재와의 공동생활)
예술의 영원한 기원은 한 형태(形態,Gestalt)가 어떤 사람에게 다가와 그를 통하여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는 데 있다. 사람이 그의 본질행위(本質行爲,Wesenstat)를 다하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형태에 자기의 온 존재를 기울여 근원어를 말한다면, 그 때에 작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행위에는 하나의 ‘희생’과 ‘모험’이 포함되어 있다. ‘희생’이란, 형태의 제단에 바쳐지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이 한 형상을 위해서 지금까지 예술가의 눈앞에 어른거리던 모든 가능성을 말살해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작품 속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나’와 ‘너’의 마주섬이 가지는 배타성이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모험’이란, 저 근원어가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근원어로 말하기를 결정한 사람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줄 뿐이요, 아무것도 자기에게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너’에 관하여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고, ‘너’에 대한 오직 전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은총으로서의 ‘나-너’만남
‘너’와 나의 만남은 은혜(은총)로 이루어진다. 찾아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해 저 근원어를 말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기울인 행위요, 나의 본질행위이다. ‘너’는 나와 만난다. 그러나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나다. 그러므로, 관계란 택함을 받는 것인 동시에 택하는 것이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삶은 참된 만남이다 (Alles wirkliche Leben ist Begegnung).
(1) 직접적 만남으로서의 ‘너’와의 관계
‘너’에 대한 관계는 직접적이다. 모든 매개물은 장애물이다. 모든 매개물이 무너져 버린 곳에서만 만남은 일어난다. 관계의 직접성 앞에서 모든 간접적인 것은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의 경계는 모든 영역을 가로질러 ‘너’와 ‘그것’ 사이에, 즉 현재(Gegenwart)와 대상(Gegenstand)사이에 그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사이에 맺어지는 관계의 직접성 앞에 내어놓고 보면, 간접적인 관계는 무엇 하나 무의미하지 않는 것이 없다. 비록 나의 ‘너’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나’에 호응하는 ‘그것’으로 변할 때에는 그것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진정한 경계는 진실로 그것을 넘어서 ‘나’와 ‘그것’사이에, 그리고 현재와 대상물 사이에 그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실재적인 것은 현재, 대상적인 것은 과거
근원어 「나-그것」의 ‘나’는 대상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은 ‘있었다(Gewesensein)’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현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 기다리며 마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상은 지탱이 아니라 정지이며 중지이고, 단절이요 고립이며, 관계의 결여이고 현재의 결여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Wesnheiten)은 현재 속에서 살려지고, 대상적인 것(Gegenstandlichkeiten)은 과거에서 살려진다.
(3) 물신숭배에 지나지 않는, ‘그것’으로 변해버린 인간
‘그것’으로 변해버린 인간이라는 것은 이를 향하여 우리가 ‘너여!’라고 근원어를 건네는 산 인간과는 전혀다른 것이다. 꾸며 만든 것은 아무리 그것이 고상할지라도 결국은 물신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4) 직접적 관계는 ‘나’와 ‘나와 마주서 있는 것’과의 상호관계를 포함
예술가와 마주서 있는 것이 예술가와의 만남으로 충실해 진다. 작품은 영원히 ‘그것’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은 또다시 ‘너’로 변하여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매혹적인 것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람인 너’에게 근원어를 건넬 때에는 그 행위의 의미가 예술에서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사랑은 결코 ‘나’에게 달려 붙어서 ‘너’마저 자기의 내용이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가 사랑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을 바라볼 때에는 사람은 그 하나하나가 자유롭게 유일무이한 존재요, 또한 하나의 ‘너’가 되어 내 앞에 어엿이 서 있는 인격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파묻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한 평생 이 세상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만민을 모두 사랑하고자 하는 어마어마한 행위에 몰입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남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특색이 나타난다. 생물과 이에 대한 우리의 관조(觀照)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의의는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신비한 것으로만 다루고자 한다. 실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머리를 돌리든지 간에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인가가 우리와 마주 서 있는 것이다.
(5) 관계는 상호적이다
내가 나의 ‘너’에게 작용하듯이 나의 ‘너’ 역시 나에게 작용한다. 사랑은 관계를 맺는 한 보기에 불과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미움을 사이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미워하는 사람이,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사람보다 관계의 영역에 훨씬 더 가까이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 ‘그것’은 번데기요, ‘너’는 나비다
우리의 세계에서 모든 ‘너’는 반드시 ‘그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니, 여기에 우리의 운명이 지닌 고귀한 우수(憂愁)가 있다. ‘나-너’의 관계가 종국에 다다르든가 혹은 수단으로 말미암아 혼탁해질 때에 ‘너’는 하나의 대상으로 변하고 만다. 예술작품을 놓고 보더라도, 이 각도에서 놓고보더라도 형상의 현실화라 할 수 있는 것도 저 각도에서 볼 때에는 그 현실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신비적 상호작용에 의해 드러나 자연계의 생명은 기술하고 분석하고 분류할 수 있는 대상이 됨으로써 수만은 법칙이 교차하는 하나의 점으로 바뀌고 만다... ‘그것’은 번데기요, ‘너’는 나비이다. 다만 그 둘은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뒤쫓는 뚜렷한 연속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심각하게 겹치고 뒤숭숭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3. 근원어와 관계에 대한 요약
‘나와 너’는 관계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상호성과 직접성, 현존성, 그리고 강렬함과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만 인간성과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나’혹은 ‘그’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정신은 ‘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사이’에 있다. 나아가서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너’에게 응답하기 위해서 사람은 그의 존재 전체를 바쳐서 관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
‘나와 너’와는 대조적으로 ‘나와 그것’은 조정과 이용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인간사이(between him)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within a man)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상호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와 그것’은 주체로서 대상에,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간접적인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은 부버로 하여금 “대화의 삶”과“독백의 삶”사이의 구별로 나아가게 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관계의 근원어로서 인간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 관계는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나’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너’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적 ‘나와 너’의 관계는 인간과 세계, 인간과 신의 관계의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며 참된 공동체의 근원어도 ‘나와 너’가 발해지는 곳에서만 출현한다.
‘나와 너’의 관계가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인간과 인간은 전 인격적인 존재로 관계할 때 실제적인 ‘나와 너’의 만남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와 너’의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을 넣어서 마주칠 때 진정한 ‘너’가 되며 그 때가 바로 진정한 대화관계가 성립한다. 부버의 사상은 이렇게 전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나와 너’의 관계로 들어가기를 요청함으로 비인격화된 지식중심적 교육환경에 문제성을 제기한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한 주체는 다른 주체를 만난다. “너라는 말이 사용될 때 화자는 아무것도 자신의 객체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상호의 삶을 같이 나누는, 자신과 같은 주체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삶은 참된 만남이다”
‘나’와 ‘그것’과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그 둘은 차등적 관계가 있는 반면, ‘나’와 ‘너’의 관계는 동격의 두 독특한 존재의 대등관계이다. 그 때의 ‘나’는 진정한 나이다.
부버는 대화적 관계를 중시 여기는데, 그것은 주관을 초월함으로써 객관은 ‘나와 너’가 만나는 좁은 능선(narrow ridge)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거기에 ‘사이’의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즉 부버는 인간 사이의 영역이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타자를 객체로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사건의 파트너로서 관계할 때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한 사람이 타자와 직면(confronting)하는 영역을 뜻하는데,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이해되는 과정을 대화라고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