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2. 마르틴부버는 유태교 탈무드에 나오는 진흙인형이야기를 하는데, 이것이 우리시대 AI와 연결될 수 있는 개념인가?
Martin Buber talks about the clay dolls in the Jewish Talmud. Is this a concept that can be connected to AI in our time?
골렘(Golem) : 유태교 전설 속에 나오는 점토로 만들어진 벙어리 인형(강력한 힘을 보유하여 박해받는 유태인을 구제한다는 인형)
우리 시대 인간 영혼의 쇠약함과 좌절을 세 영역에서 차례로 체험하게 되어져 있다.
첫 번째 영역은 ‘기술’이다. 노동하는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는 인간을 기계의 봉사자로 받아들인다. 기계는 더 이상 도구처럼 팔의 연장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연장이 되었으며, 기계의 주변에서 이리저리 운반하는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두 번째 영역은 ‘경제’였다. 늘어난 인구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엄청나게 증가한 생산량은 이성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
세 번째 영역은 ‘정치’적 사건의 영역이다. 인간은 엄청난 공포와 함께 제1차세계대전을 경험하였다.
_마르틴 부버, 『인간의 문제』, 윤석빈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pp.139-140
Martin Buber의 에세이 "I and You"에서 그는 살아나 대화를 나누는 점토 인형에 대한 탈무드 이야기를 논합니다. 그런 다음 인형은 생명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고 인형을 만든 인간은 존재의 본질과 생명을 창조하는 신의 역할에 대해 궁금해합니다.
이 이야기가 명시적으로 AI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창조의 본질과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 시대에 AI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 행동의 특정 측면을 모방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존재와 같은 의미에서 살아 있지는 않습니다. AI는 인간의 창조와 프로그래밍의 산물이며 자체 의식이나 주관적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AI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더욱 정교한 기능을 개발함에 따라 존재의 본질과 이러한 지능형 기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대한 윤리적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정교한 상호 작용 및 의사 결정 프로세스가 가능한 인공 개체를 만드는 것의 의미를 고려하고 그들과의 관계의 윤리적 차원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3. 인공지능시대, 마르틴 부버의 '나와너'를 읽는 것의 필요와 가치를 말해주세요
In the era of artificial intelligence, please tell us the need and value of reading Martin Buber's 'I and You’
인공 지능 시대에도 마틴 부버의 에세이 "나와 너"는 여전히 가치 있고 생각을 자극하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인 관계 강조: Buber의 철학은 다른 존재와의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관계의 중요성에 중점을 둡니다. AI가 우리 삶에 널리 보급됨에 따라 기계와의 관계가 다른 인간 및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I-Thou와 I-It의 존재 방식의 구별: Buber는 I-Thou와 I-It의 두 가지 근본적인 존재 방식을 구분합니다. AI의 맥락에서 기계와의 상호 작용이 이러한 존재 방식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그리고 AI를 윤리적이고 존중하는 태도로 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창조의 본질에 대한 성찰: 살아나 대화를 나누는 점토 인형의 탈무드 이야기는 창조의 본질과 생명을 창조하는 신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점점 더 정교해지는 AI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면서 우리 창조물의 본질과 지능형 기계를 만드는 데 수반되는 윤리적 책임을 반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반적으로 "I and You"를 읽으면 AI와의 관계 및 지능형 기계를 만들고 상호 작용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 고려 사항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Martin Buber 『Ich und Du』
제2부 인간의 세계 _ 첫 번째 파트
부버는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이 그의 생애에 가장 결정적인 ‘엇갈림’이었다면, 파울라와의 결혼은 그것에 반대되는 결정적인 ‘만남’이다.
<나와 너>에서 부버는 인간을 이중적 존재로 본다. ‘너’에 대한 것은 인격적인 대화적 관계이고, ‘그것’에 대한 것은 비인격적인 비대화적 관계이다. 비대화적 관계는 첫째, 경험과 이용의 관계이다. ‘경험’은 계속적으로 세계를 재구성하고, ‘이용’은 세계를 그의 다양한 목적에 이끌어간다. 둘째, 비대화적 관계는 주-객관의 관계이다. 타동사의 관계로서, 주관은 일방적이고 능동적으로 객관을 대상으로 소유하거나 목적 관계로 취급함으로 객관은 철저한 피동성으로 주관에 지배된다. 셋째, 비대화적 관계는 간접성이다. 따라서 현존성이 결여되어 과거에 있게 된다.
부버는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시대는 사회의 구조를 파괴한 것으로 본다. 기계를 장악하고 기계의 도움으로 사회를 장악하기에 이른 자본주의는 인간을 개인으로만 상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1/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 경험과 이용의 ‘너’의 확장
부버는 말한다. “역사는 ‘그것’의 세계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문화권은 이 원시성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작은 대상의 세계로부터 비롯된다. 개인의 생활에 견줄 수 있는 것은 민족생활 이라기보다 오히려 특정의 문화생활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문화는 그 문화 자체의 직접적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세계를 확대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가 얻어낸 체험을 섭취함으로써 ‘그것’의 세계를 키워간 것이다. 문화가 자기의 완전한 독자성을 발휘하고 결정으로 자기를 성취시키기에 이르는 것은, 그 문화가 발전의 궁극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 한하는 것이다. 모든 문화는 그 이전의 문화에 비해 더 확장된 대상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낱낱의 문화가 자연에 관해 얼마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를 묻는 것, 그리고 사회적 분화, 기술적 진보라는 점에서 얼마나 뛰어난가를 비교, 대조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세계는 바로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확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그것’의 세계의 근원적 관계는 ‘경험’과 ‘이용’이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경험을 매개로 끊임없이 이 세계를 재구성하며, 또 이용을 매개로 쉬지 않고 인간생활을 유지하고 편안하게 하고 정비하는 등 갖가지 목적을 세계에 부여한다. 개인은 직접 경험을 간접 경험으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의 획득’을 기도한다. 또한 개인은 ‘그것’의 이용을 더욱 ‘전문화’해 간다.
경험과 이용의 능력은 흔히는 관계의 생활에 뛰어드는 사람의 힘이 저하되었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정신생활을 영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너’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또는 맺을 수 없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이 자신 스스로 발생시킨 세계를 더 이상 지배할 수 없는 것을 부버는 이렇게 비유한다. “인간은 그가 만든 골렘을 옭아매고 해를 끼치지 못하게 만드는 말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2/ 정신의 특징 : ‘너’에 대한 사람의 응답
사람 안에 나타나는 정신이란 바로 ‘너’에 대한 사람의 응답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말을 한다. 언어, 예술, 행동이 그 말이다. 그러나 정신은 오직 하나, ‘너’에 대한 응답-신비의 심연으로부터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오는 ‘너’에게 응답하는 것-바로 그것뿐이다.
정신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 있다. 정신은 사람의 몸속을 맴도는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정신 안에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가 관계의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달렸다.
‘나’와 ‘너’의 응답이 강렬하면 할수록 응답은 더욱 ‘너’를 강렬하게 사로잡고, 그와 동시에 ‘너’를 ‘그것’인 하나의 대상으로 처리해 버린다. 이 운명으로부터 ‘너’를 건져내고 ‘너’로 하여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하는 것은 ‘너’ 이전의 침묵, 즉 상대자에게 말을 건네기 이전의 침묵 혹은 형식이나 언어로 나타내는 응답 이전, 아직 분화(分化)되지 않은 말로부터 오는 묵묵한 인내뿐이다.
이렇게 해서 ‘그것’으로 변하고, 물건 중 하나가 되어버린 ‘너’는 이제부터는 끊임없는 역전(逆轉)을 겪어야 할 운명을 지닌다. 즉 지금까지 ‘그것’이었던 것과 한 번 정신이 사람을 사로잡아 그의 안에 응답을 일으킬 때에는 갑자기 불타올라 현존적인 것이 되고, 따라서 ‘그것’은 전날의 ‘너’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너’의 운명도 ‘그것’의 세계와 결탁하여 ‘너’를 오로지 경험과 이용의 대상으로 삼기에만 급급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여지없이 짓밟히고 만다.
그 예로 첫째, ‘인식’을 생각하자. 우리가 그것을 마주 보았을 때는 하나의 독존성을 지닌 현존이었던 것이, 인식자가 그것을 다른 대상들과 비교하여 일정한 대상이 질서 속에 짜 넣으며, 이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분석할 때, 우리의 지식구조 속에서 ‘그것’이 된다.
둘째, ‘예술’의 경우에서도 사태는 매한가지이다. 화가가 자기와 마주서 있는 것을 볼 때 어떠한 형상(Gestalt)이 나타난다. 그는 이 형상을 작품으로 속박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작품은 거기 있는 것이다.
셋째, 이 밖에도 자의적(恣意的)인 자기 의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필연적이고 순수한 행위가 있다. 이 행위는 인식이나 예술의 정신보다 더 고상한 것이다. 여기서는 오히려 사람, 바로 그것이 말하자면 한탄 예술 작품이 되어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뱉어낸 살아 있는 말의 음악에 둘러싸여 별빛 찬란한 영(靈)의 하늘로 솟아오른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걸어 이에 응답한다. 이 생명은 어떤 때에는 율법을 완성하고, 어떤 때에는 이를 짓밟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계에 세계가 자기들에게 열릴 것을 의욕하지 않고, 또 이와의 산 접촉을 가질 능력도 없기 때문에 지식의 토막을 산더미처럼 쌓아올리기만 한다. 그들은 완성한 율법과 파기한 율법을 그대로 법전(法典)으로 엮는다.
3/ 관계의 능력이 상실 : 경험과 이용능력의 부풀림
‘나’와 ‘그것’을 떼어놓는 분리의 근원어에 안주하는 사람은 더불어 사는 인간(Mitmensch)과의 공동생활을 두 개의 뚜렷한 관구(管區)로 나눈다. 하나는 제도요, 하나는 감정이다. 조직은 ‘그것’의 관구(Es-Revier)요, 감정은 ‘나’의 관구(Ich-Revier)이다.
제도는 우리의 ‘바깥’에 존재한다. 우리는 온갖 목적을 추구한다. 감정은 우리 ‘안’에 존재한다. 여기에는 생명들이 깃들어 잇기 때문에 사람은 그 안에서 제도 세계의 피곤을 제거할 수 있다. 제도는 붐비는 시장 거리와 같고, 감정은 온갖 변화의 흥미로 가득 찬 여인의 방과 같다.
경계를 넘는 문제에서 무엇보다도 까다로운 것은, 이른바 개인생활의 경계를 어디에다 긋느냐 하는 것이다. 결혼생활에서 경계선은 간단하지 않고, 공적 생활의 영역에서는 완전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 그러나, 제도의 영역에서 ‘나’와 분리된 ‘그것’은 혼을 잃은 흙 인형과도 같고, 감정의 영역에서 ‘그것’과 분리된 ‘나’는 공중을 날며 헤매는 ‘혼의 새’에 불과하다.
“제도는 공적 생활을 빚어내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현대의 불안과 고뇌가 생겨난다. 이에 반해 “감정이 개인생활을 빚어내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제도로 말미암아 공적 생활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고민해본 사람은 마침내 하나의 해결책에 생각을 모은다. 감정의 힘을 빌려 제도의 질곡(桎梏)을 늦추거나 해소시키고, 또 그 자리에 ‘감정의 자유’를 들여앉힘으로써 감정이 뿜어내는 싱싱한 생명으로 제도를 새롭게 하자는 것이다. “이 따위 국가는 허물어뜨리고 사랑의 공동체로 대체시켜야 한다.”고 할 때 말해지는 사랑의 공동체(Liebesgemeinde)란 사람들의 느긋한 감정을 풍부히 지니고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살아 있는 ‘중심적 존재’와 관계를 맺고 그 다음에 더불어 살아 있는 상호 관계를 맺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살아있는 상호관계는 감정을 함축한다. 그러나 그 감정으로부터 상호 관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룩해내는 그것은 바로 그 살아 있는 ‘중심’이다.
공동생활의 조직만이 아니라 개인생활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감정의 발로가 자유롭다 하더 하도 그것만으로써 조직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가 없다. 부부는 어느 때나 결혼 성립의 조건인 “서로가 서로에게 ‘너’를 밝히 보여준다.”라는 것을 게을리 하는 동안에는 참으로 새로운 생명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중심적 ‘너’이외의 다른 어떠한 힘을 가지고서 결혼생활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이는 사실상 결혼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박홍규는 마흔다섯의 성숙한 나이에서 쓴 ‘나와 너’를 그의 핵심사상으로 보면서도, 일흔 두 살에 쓴 <유토피아의 길>(1950)을 비롯한 그의 사회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 부버는 차별받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홀로코스트라는 극단의 반유대주의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억압에서의 해방을 종교를 비롯한 모든 삶의 만남에서 추구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4/ 근원어 ‘나-그것’은 악이 아니다
그러나, 이 근원어가 마치 현재적 특질을 가지고 있는 듯이 자부할 때에는 물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이 이에 대해 속수무책일 때에는 ‘그것’의 세계는 점점 증대해서 사람에게서 ‘나’의 현실성을 빼앗고 또 사람들을 짓밟게 된다.
5/ 현대의 인간의 집단생활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세계로 떨어지는가
경제와 국가라는 우리의 생활을 규정하는 두 조직이 완벽한 것이 되고 보면, 온갖 직접적 관계를 부정하고, 그 자체 이외의 온갖 것이 내리는 결정은 모질게 거절하는 것밖에 다른 어떠한 입장에도 설 수 없다고 생각된다. ‘나’의 무제한적 지배 덕분으로 이 두 조직은 견고하고 대규모적인 ‘객체적’ 조직을 갖게 된다.
국가라는 기관차에 올라탄 화부(火夫)는 아직도 석탄을 쌓아올리고 있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자들이란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기관차를 움직이는 시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일터의 우두머리들(경제인)이 아무리 확신에 찬 미소를 우리에게 보낼지라도 죽음의 신은 이미 그들의 심장을 갉아 먹고 있다. 더욱이 이 폭정 아래에서 ‘나’는 날이 갈수록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박탈당하는데도,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도리어 지배자이기나 한 듯이 꿈꾸고 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도 이제는 ‘그것’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용 의지의 보금자리인 ‘경제’도, 권력 의지의 보금자리인 ‘국가’도, 그것들이 정신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에는 생명을 획득할 수 있다. 만일 경제나 국가가 정신을 내버릴 때에는 동시에 그것들 역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날 정신은 방황하고, 나약하고, 퇴화하고, 모순덩어리가 된 가짜 정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정신이 다시 한번 ‘너여!’하고 외칠 수 있는 생명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그때 정신은 세계와 스스로를 한꺼번에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부버는 정치, 경제, 국가는 란다우어의 주장한 것처럼,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참된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취지와 무관한 경우에만 악이 된다’고 보았다. 부버에게 그것은 참된 공동체 건설을 위해 반드시 유념해야할 점인 것이다. 부버는 경제(이윤에의 의지), 국가(권력에의 의지)는 정신에 관여하는 경우에만, 즉 사회생활의 모든 조직이 관계를 맺는 힘에서 생긴 특질을 갖는 경우에만 삶에 관여한다고 보았다.
6/ 인과율(因果律)과 ‘그것’의 세계
‘그것’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인과율은 무제한성을 주장한다. 또한 인과율은 자연에 과학적 질서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보아서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그것’의 세계에만 속박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것’을 벗어나 ‘너’와의 관계에 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관계에서 ‘나’와 ‘너’는 전혀 자유로운 입장에서 인과율과는 몰관계한 순수 행위를 완수한다.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만이 자유인이다. 결단을 내릴 때 사람은 비로소 ‘너’의 면전(面前)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악한 충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결단을 내리는 자이다. 이 세상에 악마라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결단을 내리는 자를 말함이 아니라 진실로 영원히 결단을 내리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유의 보장을 받은 사람에게 인과률은 아무런 압력도 되지 못한다. 그가 관계의 지성소를 되풀이하여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바로 그의 인생에 깊은 의미와 특질을 부여하는 사실이다. 운명과 자유는 서로 굳은 약속을 주고받은 사이이다. 그러기에 참으로 자유를 성취한 사람만이 운명을 만날 수 있다. 운명은 인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성취이다. 자유와 운명, 이 둘은 서로 어우러져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 준다.
문화는 만남이라는 근원적 관계에 근거하여 비로소 발생한다. 문화의 기원은 ‘너’에게의 응답, 즉 정신의 본질적 행위에 근거한다. 문화가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의 세계를 중심으로 삼고 발전해나가지 않는다면, 그 문화는 생명을 상실하여 순식간에 ‘그것’의 세계로 굴러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물은 필연적으로 계기(繼起)한다”는 가르침 역시 인간의 자유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가르침은 바둑을 두는 사람들로 그 놀이의 규칙을 순수히 지키든가, 그렇지 않으려거든 놀이를 그만두고 떠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전환을 감행하는 사람은 바둑판을 뒤엎어버리고 바둑알들을 팽개칠 수 있다. 사람에게 치명적 위험은 숙명을 믿는 것이다. 이 신념이야말로 사람을 속박하여 전환을 감행할 수 없게 만든다. 인과적 법칙에 근거한 온갖 역사적 고찰은 ‘이미 발생한 것에 불과한 것’(Nichts-als-geworden-sein)에 역사적으로서의 질서를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숙명에의 신념은 정신의 실재를 모르며, 숙명의 구조는 정신에 들어맞지 않는다.
‘너’의 세계는 닫혀진 세계가 아니다. 집중된 정신을 가지고 ‘너’의 세계를 보고자 하는 사람은 마침내 자유를 의식하게 될 것이다. “자유는 없다.”는 신념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자유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7/ 인간의 세계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경계에서 (부버의 공동체에 대한 이해)
「나와 너」에서 부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인간을 가르쳐 세계나 타자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외적으로 규정되는 사회적인 단계는 내면에서 작용하는 힘에 의하여 극복되기 때문이라는 것에서이다. 그러나, 사회적이라고 하는 개념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섞이어 있다. 하나는 관계에 의하여 쌓아올려진 공동체(Gemeinschaft)이며, 다른 하나는 관계를 모르는 여러 단위 인간(Mensch-Einheiten)의 집단화로 이것은 관계를 상실한 현대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회성이라고 하는 지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공동체의 밝은 집을 세우는 것은, 사람과 신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작용하는 바로 그 힘의 활동이다.
인간은 만남을 전적으로 갈망하고 있다. 대화를 통한 인격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공동체이다. 부버는 말하길 정신은 ‘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사이에 있다. 정신은 사람의 몸뚱이 속을 맴돌고 있는 피와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있어 ‘너’에 대한 응답을 할 수 있는 동안에는 그는 정신 안에 살고 있다.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은 ‘나와 너’의 충만한 관계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즉 대화로서 참된 공동체는 서로 ‘너’라고 진실 되게 부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집단이다. 이때 비로소 나와 각각의 너는 ‘우리’가 되는 것이다. 부버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경계하였다. 이상적 공동체는 서로 ‘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집단은 개인을 집어 삼켜버림으로써 개인을 단순한 허상으로 만드는 군중이나 전체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립이라는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내적인 자신의 관계성 안에서만 관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 아니요, 그리고 집단주의는 전혀 인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적 인간관이나 집단주의적 인간관은 그 어느 것도 현대인의 존재방식에 대한 정당성을 규명해주지 못한다. 개인주의적 허구성과 집단주의적 환상은 인간의 한 단면만 설명해 줄 뿐, 인간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이에 부버는 자신의 고유한 입장으로서의 제3의 인간관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인간’이다.
부버가 특히 강조하는 종교와 사회주의가 만나는 점은 “구체적 인격적 생활”이라는 것이다. 강조점을 내부적인 면에 두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신 앞에, 그리고 그 세계 속에 구체적 인간 인격이 서 있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인다.
_ 숨쉬는 인문학 김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