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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Apr 24. 2022

인형은 안 돼

어린이날 선물의 기준

곧 어린이날이다. 뭘 갖고 싶냐는 말에 8살 초딩이 된 아이는 티니핑 봉제인형을 사달라고 했다. 새끼 손가락만한 플라스틱 피규어로는 성에 안 차는 모양이다. 자기 얼굴보다도 더 큰 진짜 티니핑만한 인형을 사달라는 얘기다. (여자 아이 엄마라면 티니핑 개미지옥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실 것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아기 때부터 애착인형이 딱히 없었던 아이는 인형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주섬주섬 모인 인형들을 얼마 전 집을 치우면서 싹 정리했더랬다. 갖고 놀지도 않지만 단지 귀엽다는 이유로 갖고 있기에는 인형은 금방 먼지가 틸틸 붙고, 부피도 많이 차지하는 애물단지다. 근데 초등학생씩이나 된 큰 아이가 새로운 인형을 사달라고 할줄이야. 

봉제인형 얘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설 세뱃돈으로 티니핑 피규어를 사주었을 때부터 줄기차게 아이는 다음 선물을 받을 어린이날만을 기다렸다. 어린이날엔 봉제인형을 갖고 싶다고 스무 번도 넘게 말한 것 같다. 그 때마다 애써 못 알아들은 척 어물쩡 넘어갔다. 어린이날이 오기 전까지 아이의 위시리스트가 바뀌기만을 바랬다. 이제는 진짜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물었고, 여전히 아이의 대답은 같았다. 엄마가 뭔지 몰라서 자꾸 물어보는 줄 알았는지, 아이는 들뜬 얼굴로 태블릿까지 들고 왔다. 엄마 내가 말한 인형이 이거에요!

 

나도 뭔지 안다, 이 녀석아. 망할 유튜브. 티니핑 인형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영상을 무한반복하는 게 영 불안했었다. 커다란 사이즈에 폭신폭신한 느낌, 심지어 퀄리티도 좋아 진짜 만화에 나오는 티니핑이랑 똑같았다. 아이들 눈에 혹할 만 했다. 당연히 그만큼 비쌀거고. 바람과 달리 여전히 인형을 말하는 아이에게 참지 못하고 면박을 주고 말았다. 

"인형은 왜?"

"귀엽잖아요."

"야, 8살이 인형같은 걸 사달라는 게 말이 되니? 그건 4살 동생이나 갖고 노는거지!"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알았어요.'라고 했다. 다행히(?) 티니핑 캐릭터 아이템은 무궁무진했기에, 아이는 금방 차선책을 찾은 듯 했다. 티니핑 다이어리 꾸미기 세트였나.

이제 됐다, 싶으면서도 찜찜하다. 착한 아이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내 속에 반발심이 일었다. 뭘 갖고 싶냐고 물어봐놓고, 왜 그걸 갖고 싶냐고 나무라다니. 엄마는 늘 이런 식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해야 한다는 식. 또 하나, 꾸미기 세트는 되고, 인형은 왜 안돼? 인형은 몇 살까지 갖고 놀아야 하는 건데? 몇 살은 무엇을 해야한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인형을 갖고 놀 나이. 그런 게 정말 있는걸까. 대학생들도, 아니 어른들도 가끔은 인형을 선물하기도 하는데. 

문득 며칠 전 회사 앞 카페에서, 어떤 아이돌 팬클럽 이벤트를 했던 게 기억난다. 여기저기 난 생전 처음 보는 예쁜 남자애의 사진을 소중히 붙여놓은 포토존에서 여자 아이들이 모여 셀카도 찍고, 팬클럽 회장쯤 되어보이는 여자애가 산처럼 쌓여있는 사진을 몇 장씩 소중히 봉투에 넣어 팬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사진을 받은 팬들은 마치 그 꽃미남이 앞에 있는것 마냥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동동거리며 사진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건 몇 살까지 해도 되는걸까? 뽀샤시한 슈퍼스타의 사진은 언제까지 갖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일까? 나는 저런 장난감이 있었나? 나는 덕질을 해본 적이 있었나?  

한 때 H.O.T 토니안에게 흠뻑 빠졌던 적이 있긴 했다. 연말 가요대상에서 카메라가 계속 문희준만 비추고 토니안은 몇 번 나오지 않아 화가 난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났던 적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의 기가 막힌 얼굴도 기억난다. 그 정도였다. 나는 팬클럽이 되어 토니안을 직접 만나러 간 적도, 사진이나 브로마이드를 온 방에 붙여놓지도 않았었다. 무조건 사 모으던 캐릭터나 물건도 없었다. 더 어렸을 때도 공주 옷이나 장난감 무엇을 사달라고 떼 쓴 적이 없었다. 착하고 순응적이고 지나치게 효율적인 인생. 나쁘진 않았지만 아쉬움도 있다. 딱 하나 떠오르는, 연말 가요대상을 보며 울고 있던 그 시절 기억에도 이렇게 마음이 저릿한데. 내 인생에 그런 여러 색깔의 감정들이 조금 더 많이 있었다면, 때로는 좀 쓸데없어 보이는 집착이, 갖고 싶어 미치겠는 열정이, 곁에 두고 계속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감이 내 인생을 조금 더 풍요롭게 했을 수도 있을텐데. 나는 조금 돌아가야만 볼 수 있던 인생의 또 다른 장면들을 시간 낭비, 돈 낭비라며 원천 차단해버린 것은 아닐까. 3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조금씩 곁눈질을 하며, 지금보다 훨씬 제약이 없고 순수했을 어린 시절의 덕질이 아쉽다. 지식을 쌓고 올바르게 성장하는 데에만 몰두하느라, 뭔가에 감정이 동할 때 그것의 효용을 빛의 속도로 계산하는 이성의 힘을 키우느라, 그 시절에만 허락되는 쓸 데 없는 몰입의 경험을 충분히 해보지 못한 것이 좀, 서글프다. 

봉제인형 따위에서 생각이 너무 갔다. 

결론적으로 나는 아이가 해맑게 푹 빠진 어떤 대상을 '8살은 원하면 안 되는 것'으로 차단함으로써 아이의 인생에서 덕질의 씨앗을 원천 봉쇄해버린 것 같은 자책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봉제인형이든, 아이돌이든,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그냥 귀여운 것, 그냥 좋은 것, 하등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차단할 지 모른다. 나 자신한테 그래왔듯.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아이는 이미 마음 속에서 인형은 지운 듯 했다. 그래, 덕질을 허용한다고 해서 다 사줄 수는 없다. 요즘 장난감이 좀 비싼가. 그래도 아이가 좋아하는 걸 '그딴 거'로 치부하지는 말아야지. 좋아하는 그 마음만큼은 소중히 대해줘야지. 조금은 쓸모 없는 것도 흠뻑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키워줘야지. 

혹시 모르니 한번만 더 말을 해볼까. 인형이 진짜 갖고 싶냐고. 정말정말 꼭 갖고 싶냐고. 하, 티니핑. 이 요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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