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르지 않기

진짜 슈퍼우먼이 되는 법

by 김연의

올해 초 팀장으로 보임했을 때, 여러 가지 타이틀이 붙었었다. 기획실 최초 여자 팀장이었고, 나이도 최연소, 거기다 아이가 둘인 여자 직원들 중에서는 최초의 팀장이었던 것도 한 몫 했다. 타이틀이 막 붙자 잘 해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열정이 불타올랐다. 감투 씌워주니 신난 것도 있었지만, '내가 나가떨어지지 않고 잘 해야 여성 후배들이 힘을 내서 따라올테니까.' 하는 다부진 결심이 컸다.

하늘 높이 치솟은 열정과 달리, 현실은 꽤나 암담했다. 엊그제까지는 내 일만 하면 되었는데 팀장이 되고 나니 회의란 회의는 다 참석해야 하고, 정작 팀원들에게 시켜야 하는 실무는 내가 다 끌어안고 낑낑대고 있었다. 맨날 팀원들 다 보내고 혼자 남아 일을 했고, 자연히 아이들은 12시간씩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나보다 더 바쁜 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주말근무와 야근으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기에 모든 걸 혼자 감당해야 했다. 매일 열심히 사는데도 늘 힘에 부쳤다. 체력도 딸리고, 일은 줄어들지를 않았다. 집에서도 두 아이랑 씨름하며 녹초가 되어 잠들고, 다음 날엔 허둥지둥 출근하기 바빴다. 팀장이 되었으니 리더십도 길러야 하고, 팀의 방향도 고민해야 하고, 네트워크도 쌓아야 하는데 나는 뭘 하는지 하루종일 정신이 하나도 없고 늘 시간에 쫓겼다.

처음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팀장 역할에 익숙해질수록 '잘 해야 한다는' 기준 역시 함께 높아졌고, 늘 아슬아슬 위태로운 상태로 일과 육아, 건강을 놓고 줄타기를 했다. 매일 제일 늦게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나를 보며 선배 한명이 힘들겠다고 걱정을 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한 몸 불살라서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죠."

이 말은 진심이었다. 적은 나이가 아닌데도 기획실 최초의 여자 팀장, 회사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맡기는 최초의 엄마 팀장이 된 건, 이 회사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제도적으로 부족한 것도 있지만,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일의 강도와 조직 분위기라는 얘기다. 내가 무슨 잔다르크도 아니고, 굳이 이 회사의 여성 리더십을 위해 몸 바칠 이유는 없지만, 후배들이 따라올 수 있는 길을 터야겠다는 작은 사명감만큼은 진심이었다.

"아니, 불사르면 안 돼. 그럼 아무도 너처럼 못해."

...아!

선배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너무도 맞는 말이었다. 길이란 자고로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다 찢기고 몸 버리면서 힘겹게 헤쳐간 길은, 뒷사람이 도무지 쫓아가기가 힘들다. 그건 길을 닦는게 아니라 이 악물고 버티는 혼자만의 싸움이다. 동기부여를 하기는 커녕, '어우, 난 저렇게 못해.'라며 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분명히 후배들한테 귀감이 되고 자극을 주는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 불사르면 재만 남는다. 혼자 뜨겁게 불타오르다 죽고 만 지독한 여자를 누가 따라나서고 싶겠는가.

정답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닌, '정도'를 찾는 거였다. 회사 일도, 아이들도, 나 자신의 건강한 몸과 마음도 적당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단순히 일을 덜 하거나 아이들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내 커리어와 아이들의 생애주기에 맞는 최적의 일을 찾아, 어떻게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아이들의 상태를 섬세하게 돌아볼 수 있는 약간의 여유면 충분하다. 일상의 루틴을 '정상적으로' 영위하고, 또 그런 삶이 가능하게끔 하는 회사 차원의 제도와 문화를 세팅해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제부터는 불사르지 않기로 했다. 매일매일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일과 육아, 자기관리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버거운 날은 다 내려놓고 쉴 것이다. 필요하면 가족에게, 주변 이들에게 SOS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행복하고, 편안해야 한다. 그래야만 오랫동안 타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잔잔한 빛을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불사르면 안 된다고 해서, 열정의 불씨를 꺼트릴 필요는 없다. 다만 최고가 아닌 '최선'에 집중하며, 오늘 하루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살아가면 된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고 굴러가듯, 나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이 결국 중요하다. 팀장이든, 여자든, 아이가 몇이든.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