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가 만들어 낸 충격이지만, 십 대 시절에 영어를 못하는 백인 여자애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 걸 이해하기 전 이야기다. 미국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에 놀러 가서 놀이기구를 타기 위한 긴 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의 1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어린 백인 여자애 둘이 직원에게 뭐라고 물어보고 싶어 하는데, 영어를 못 해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백인이 미국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독일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해외 생활이라는 테마로 뭉뚱그려 미국의 이미지로 채워넣은 것은 내가 독일에 가기 전 했던 가장 큰 실수였다. 이 글에서는 내가 은연 중에 착각해서 가장 크게 실망했던 능력주의와 계급주의의 기조 차이, 그리고 인종차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미국과 한국은 경쟁을 통한 성취와 능력에 대한 인정을 기본적 골자로 받아들인다. 경쟁에서 승리해 두각을 드러내는 능력 있는 사람은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받는 것이 옳다는 것이 미국을 구성하는 기초적 논리이다. 이러한 논지 하에서 막대한 부를 소지한 기업의 CEO 혹은 셀레브레티의 이미지는 미디어 속에서 긍정적으로 재생산된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대우받고 인정받는 것은 미국이 내건 가치이며 약속이다.
하지만 유럽은 보다 계급주의적이다. 국가에 따라서 계급주의의 세부적인 작동 방식은 차이가 있겠지만, 계급은 언어 혹은 여가 생활, 학력 수준 등으로 구분 지어지는 보다 내재적인 것이다. 어떤 어휘를 사용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어느 학교에 가는지와 같은 요인들은 이른 나이에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그 시기를 지나고 나면 바꾸기 어렵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과 독일의 부자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의 회장의 올해 자산이 얼마인지 매 년 들을 수 있는 미국과 달리, 독일에는 유명한 부자나 셀렙이 없다. 독일에서 모두가 알 만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15년간 독일 총리를 역임한 앙겔라 메르켈 정도일 것이다. 그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독일인은 히틀러에서부터 괴테, 실러, 베토벤, 바흐, 아인슈타인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미 죽었다. 독일에는 니베아, 다임러, BMW, 보쉬와 같은 수많은 세계적 기업들이 존재하지만, 내가 이름을 들어본 건 하리보의 창립자뿐이다 (Haribo는 Hans Riggel Bonn의 약자로, 본 출신의 한스 리겔 씨라는 창립자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다). 6년간 독일에 살면서 돈이 많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독일인으로부터 들은 건 라이프니츠 (Leibniz,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비스킷)의 높으신 분이 박람회에서 우리 회사 부스에 들렀을 때뿐이었다. 누구나 알 법한 유명 연예인도 없어서, TV나 광고판 속에도 유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독일 광고에는 식물 추출물이 들어간 약 광고를 하면 식물 그림이, 데오드란트 광고를 하면 겨드랑이, 화장실 청소용품 광고를 하면 변기가 메인으로 들어간다.
미국이 자본주의적 구조 하에서 권력을 돈으로 환산하는 동안, 독일 사람들은 나온 학교를 따진다. 인문계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을 나오고, 졸업시험인 아비투어를 치는 것은 평생에 걸친 나 공부 좀 했다의 상징이 된다. 고등교육기관도 중요하다. 보다 학문적인 깊이가 있는 대학(Universität)을 나왔는지, 실용학문을 다루는 전문대(Fachhochschule, 우리나라의 전문대와 다르다. 졸업에 걸리는 년도 등은 같지만 같은 학문이라도 학술적 내용보다는 실습 등 실무 내용에 보다 초점을 맞추어 배운다)를 나왔는지, 어디까지 공부했는지 또한 매우 중요해서, 박사라도 하나 취득하고 나면 그 사람의 독토어(Dr.) 타이틀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된다. 독토어 숭상하는 나라답게 여러 개의 박사를 취득하면 명함에다가 Dr. Dr. Dr. 하는 식으로 여러 개의 독토어를 전부 표기해 준다.
이러한 계층은 지역적으로도 구분이 되는데, 동독과 서독, 남독과 북독에 대한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은 동유럽, 남유럽에 대한 멸시로 이어진다. 그 아래 계층에는 많은 경우 '아프리카인' 혹은 '무슬림'과 동의어로 쓰이는 '외국인' 이 따라붙는다. 아시아라는 나라는 잘 모르지만 볶음 국수를 만들고 여름 휴가지로 각광받는 곳이고, 일본인들은 신비로운 동양의 착한 사람들이다 (나루토를 봤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계층적, 지역적 사대주의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아남는 곳은 미국 정도가 유일하지 않을까. 완벽한 미국 영어를 하는 순간 마법같이 상냥해진 독일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 특이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 온 아시안은 계급 외적인 존재일 때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딱히 나쁠 것, 해 될 것 없는 순한 친구들이지' 정도의 반투명한 딱지가 붙는데, 어쨌거나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닌 허가적인 성격을 띠어서, 허락받은 출입 가능 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엄청난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고급 리조트에서 묵는 동양인 가족이 일제히 받는 따가운 시선이나, 콘퍼런스 미팅 등에서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명확히 같은 의미를 내포한다. 인력이 부족해 능력 있는 인력들에게 쉽게 비자를 내주는 고령화 국가 독일에서 사원으로 일하는 것과, 팀 리드가 될 목표를 갖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개인의 가치가 성취 가능한 것이 아닌 타고나는 것이라면 노력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노력하는 한국인을 이상하게 본다. 별 것도 아닌 일을 좀 열의 있게 해볼라치면 어련히 주변에서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는 안쓰러운 시선이 쏟아진다. 그러한 시선은 명확하게 뜻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이러다 쓰러질까봐 하는 걱정은 명백히 아니다. 왜 의미가 없는 일에, 헛된 힘을 쓰지?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내가 무언가를 가열차게 덕질하고 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처음 보는 먹거리를 권할 때보단 긍정적인 반응이라는 것일까.
여하튼 이러한 사회 권력 구조는 눈 가리고 아웅할 여지도 없이 차별적 토양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적 토양은 인종차별 문제에 있어선 독일 역사를 만나 아주 괴이해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이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제거하려 한 사실로 '인종차별은 아주 나쁜 것이다'라는 인식은 독일 전체에 깔려 있다. 문제는 '무엇이 인종차별인가'의 논의에서 당사자는 빠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없이 인종차별에 반대한다. 따라서 차별을 당한 당사자의 지적은 상대를 향한 아주 불쾌한 모욕이 된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 일어난 한인 부부 사건이 아주 좋은 예시다. 지하철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코로나"라는 말을 듣고 폭행당한 부부는 이에 인종차별이라고 맞섰다. 독일 경찰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국인 부부를 비난했다. 독일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들은 그건 인종차별이 아니다고 했다. 독일에서 극우 정당인 AfD가 매 선거 때마다 얼마나 표를 더 얻고 있는지와, 얼마 전 경찰관 여럿이 극우주의 이미지를 주고받은 사실로 정직된 사건 등의 우경화 경향을 보면, 역사로부터 진일보된 현 세기의 합의 가능한 인종차별기준을 근시일 내에 마련하기는 힘들 것 같다.
미국과 캐나다 같은 이민의 역사가 길고 많은 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에는 학교나 회사 등에 공식적인 해결 루트가 존재하고, 이런 문제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훨씬 크다. 인종차별에 맞서 목소리를 내고, 그게 받아들여지거나 지지되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면 북미일 가능성이 크다. 독일은 사정이 다르다. 쓸 데 없이 예민한, 불편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편한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싸움을 하고 있다면, 혹은 해야 한다면, 지루하고 외로운 싸움이 될 것임을 인지하고 쉽게 힘이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독일, 유럽 내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가시화시키려는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조선일보. 2020. 獨서 한인 유학생 부부, 코로나 인종차별에 폭행까지 당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27/2020042702949.html
한국일보. 2020. 독일 공권력에까지 침투한 '극우 망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