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삶 초반중반종(?)반 다이제스트
독일에 처음 왔을 땐 모든 것이 설레고 또 혼란스러웠다. 8천 키로 이상 떨어진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이 곳은 모든 것이 다른 곳이라, 신기한 것도 이상한 점도 많다. 미국 영화와 드라마는 접할 기회가 많지만 독일 매체는 애를 써서 찾아봐도 즐길 만한 게 없어 독일인에게는 당연한 기본적인 절차조차도 어색하다.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아이 컨택을 해야 하는지, 처음 만난 사람들과는 어떤 주제를 주고 받아야 하는 지가 다 어렵다. 처음 만난 사람과 눈을 보고 악수를 하며 내 이름을 말하고, 수퍼마켓 등에서도 캐셔와 아이컨텍을 하고 미소를 지으며 안녕을 말한다.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를 짓는다. 병원에 가도 의사와 악수를 하고, 한국보다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게 되는 상황들이 자연스럽다. 사람들은 여유를 가지고 일한다. 당시의 나는 낯선 곳에 떨어진 아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많은 책임을 돌리며 힘내자고 다짐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내 독일어 실력이 아직 모자라서, 내가 아직 이 문화에 익숙하지 못해서,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이 익숙해지면 나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겠지.
이러한 초반의 혼란이 지나가고 나자, 사람들은 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주의라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더니 누군가가 없는 자리에서는 그 사람 뒷담을 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더니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직업학교를 나왔는지 따지며 차별을 둔다. 독립적이라 성인이 되면 혼자 나가 산다더니 그 나가 사는 돈은 대부분 부모님이 대 준다. 논리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을 확실히 배웠다더니 논리적이지 않은 말도 그저 당당하게 주절댄다. 역사 인식과 반성이 확실하다더니 그저 문화를 금지당한 자들 같다. 우경화되는 추세를 보면 진정한 반성과 교육이 존재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모든 것이 훌륭한 ‘시민의식이 뛰어난 선진국’이라더니, 결국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시간조차 지나가고 나니 그들이 얼마나 나와 다른지 와 박히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평생에 걸쳐 내가 키워내고 길러낸, 어디로부터 날아와 왜 자라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내 당연한 생각들이 남에게 신기한 것으로 재단되고 평가되는 경험들은 쉬이 넘기기 힘든 것들이었다. 가족은 웬만해서는 끊어낼 수 없다던가, 누군가가 힘들어 할 때 같이 있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던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완벽하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냥 적당히 물러서고 넘어간다던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들과 삶의 태도마저도 낯설게 재단당했다. 그저 동의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왜 그러는지 아무리 애를 쓰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색한 순간들은 때론 가슴아프다. 최선을 다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주 다른 토양, 굳이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안락함, 심심풀이 삼아 던져보는 몰이해는 여행자가 아니기 때문에 따갑다. 나와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에겐 아주 당연한 개념을 오분, 삼십분간 풀어 설명해야 하는 것조차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베푸는 친절인 곳에서, 내년, 5년 뒤, 10년 뒤를 꿈꾸는 것. 내 당연한 세계의 근간이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닌 세계 속에서 사는 것은 지난하다. 게다가 누군가가 호시탐탐 그걸 ‘이국적이다’ ‘미개하다’ 판단하며 베어내려고 노린다면, 무시하던지, 옹호하던지, 힘을 합쳐 베어버리던지. 어느 쪽이든 내 가치관을 공유하고 지켜주는 사람들과 지내는 것보다 정신력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언어와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 지면서 해결되는 서러움도 분명 존재한다. 버스 기사 혹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소리를 지를 때 대응할 능력을 갖게 되면 해결되는 문제도 많다. ‘쟤(다른 독일인 친구)는 되는데 나한테만 소리지르는’ 류의 사소한 문제들은 맞서 소리를 지르면 상당 부분 해소된다. 하지만 백인들 사이에 끼어 앉은 유일한 동양인인 거의 모든 순간에, 내 이름만 기억하지 못한다던가, 나와만 아이컨택 혹은 악수를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미묘한 수많은 시그널들은 언어와 무관하게 희망 없이 날아와 박힌다.
나이가 어릴수록 경험으로 인한 사회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이 곧 나의 새로운 기대가 될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이가 충분히 든 다음에는 그러한 기대가 경험을 통해 얻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다. 우리는 이 정도 친해졌으니 이 정도를 기대해도 되겠지와 같은 것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며 넘어 갈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이 힘들어도 거치고 나면 좋은 시간이 오겠지, 혹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는 믿음조차 부정당할 때면 기대의 근간은 사정없이 흔들린다. 이러한 기대는 배신당하기 전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실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조차 알기 힘들다.
독일에서 사는 동안 나와 내 주변의 기대는 절대 호환되지 않는 두 개의 모듈마냥 달랐다. 처음에는 희망적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구경하고, 생각해보지 못한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내 문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을 통해서 관심을 가지게 될 거고, 설명해 주면 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이해하지 못했고, 친해진 사람들은 다른 삶을 찾아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결국 남은 것은 5년째 '한국 나이라는 게 있는데' 하는 레퍼토리를 읊는 나였다. 가끔은 전혀 내가, 한국이, 아시아가 아닌 그들 상상 속의 이야기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급격히 지쳤다. 다 싫증이 났다.
기대하기를 그만둔 순간 독일과 나의 관계는 사실상 끝이 났다. 내 기대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내 기대를 얘기할 수 있는 사회라고 기대했고,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 그러나 내 기대를 말하면 말할수록, 내 편은 없었다. 내가 일했던 회사에서 비EU국에서 온 완전한 외국인 직원으로 고용되는 건 내가 처음이었다. 비자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회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외국인청이 요구한 서류 또한 회사 내부 자문의 이유를 들어 받기 까다로웠다. 난 다행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를 받았고 무사히 비자 신청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건의를 해도 나아지거나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1년 후 들어온 사원은 나보다 더 끔찍한 프로세스를 겪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비자 없이는 계약서를 줄 수 없다고 했고, 비자청에서는 계약서 없이는 비자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그 사원은 정직원으로 들어오기로 합의를 하고도 3개월 단위 계약서에 사인하고 3개월씩 비자를 연장했다. 회사는 사원들을 생각하고 여러가지 개선안을 받아들이고 더 일하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회사는 우리 연방주에서 일하기 좋은 회사 3위 상을 수상했다. 나는 내 아주 큰 불편을 얘기했지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내 불평불만에 대해 매니저는 한시간동안 회사 입장을 방어했다. 백오피스는 할 일이 아주 많고, 일손이 달린다고 했다. 개선점을 말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내게 아주 중요한, 매우 불편했던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자주, 나는 분명 거기에 존재하는데 내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