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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먀우 Sep 01. 2019

제 1세계 불평

독일어 중급 어학 시험 글쓰기 부분의 단골 문제는 "불평하는 편지 쓰기"였다. 가뭄에 콩 나듯 광고하기 같은 다른 주제가 나오긴 했으나, 아무래도 시험 출제진들은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이 이 험한 나라를 헤쳐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이 나라의 근간은 불평이라는 것을 잘 알았나 보다. 불평의 내용은 항상 다양했다. 세탁기가 배달 되지마자 고장났어요, 냉장고가 배송이 되지 않아요…….


내가 다니던 어학원에는 시리아인이 아주 많았다. 그네들은 어째서인지 단 한명도 빠짐없이 의사였다. 같은 플랫(WG)에 살던 시리아인 A는 시리아에 의사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했지만 나는 의사 정도 되어야 난민 신분이 아니라 어학원과 같은 정식 과정을 거쳐서 독일에 정착할 수 있는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내 어학원 반에는 A와 S 두 명의 시리아인이 있었다. 어느 날 수업 주제가 SNS였던 날에 S는 시리아에서는 미사일이 한 지역에서 발사되면 다른 지역에서 트위터로 그걸 보고 빠르게 대처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는 애들 끼리 알음알음 모여 네카 강변의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 때, 한 사람은 불꽃을 바라보며 마치 우리 동네 전쟁 소리같다, 라고 말했다.


가끔은 태어나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해 버린다는 생각을 한다. 공간은 교통의 발달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고 하지만, 내가 어느 시간대에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는지는 개인의 거의 모든 생각을 정의하게 된다. 손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로 인해 그 모든 사회적 합의들은 극복 가능한 것으로 변모하지만, 인간의 높은 적응성으로 인해 그건 또 내 안에서 일어난 이질감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든 것들이 되고 만다. 참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왜 나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실은 좋은 일도 나쁜 일만큼이나 우연인데.


시리아에 남겨진 A의 아내는 A가 독일에서 어학원을 다니는 동안 딸을 낳았다. A는 난민 신청을 하려면 할 수 있고, 그러면 독일에서 지원금이 나오지만 그러면 시리아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얼른 시험을 치고 일을 구할 거라고 했다. 그는 항상 공용 공간을 광이 나리만치 깔끔하게 청소했고 아주 성실하게 숙제를 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가 얼른 직장을 구하고 가족을 독일로 데리고 올 수 있기를 바랐다.


독일은 모든 것이 참 쉽다. 한국의 크나큰 관문인 대학을 예로 들자면, 독일의 많은 대학 학과에는 입학 정원이 없어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아비투어를 통과하면 성적이 아주 나빠도 입학할 수 있다. 의대나 심리학과 같은 인기 학과에 들어가려면 아비투어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지만, 이 시험은 수능처럼 대학 입학 시험이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기 때문에 일생 단 한번만 칠 수 있다. 성적이 미치지 않는다면 대학에 대기를 걸어 놓고 몇 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입학할 수 있다. 사회봉사 경험 등이 가산점이 된다. 바로 대학에 가는 경우도 많지만 아비투어를 친 다음 일이년간 사회봉사를 하거나, 아니면 세계 여행을 다니는 것도 아주 흔하다. 한 번은 어떤 독일인과 이런 얘기를 하다가 한국의 수능은 일 년간만 유효해 매년 새로 쳐야 한다고 하니 그럼 세계 여행은 어떻게 하냐며 놀라더라. 아비투어의 경우 예전에는 담임 선생님이 성적을 매겼는데, 성적을 편파적으로 주는 등의 문제가 있어 이제는 개편되어 각 주가 같은 문제를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입학을 하면 한 학기 2-300유로 (약 3-40만원) 정도의 행정 처리비를 등록금처럼 낸다. 이 금액에는 그 도시 혹은 주 내의 모든 교통을 커버하는 교통권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소득이 높지 않은 경우 바푁(BAföG)이라는 지원금을 최대 월 735유로(현 환율로 대충 95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이 대출은 취업한 뒤 반을 갚게 된다.


독일인은 독일인으로 태어난 순간 실패할 수 없다. 정부에서 집과 최소 생활비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노숙인조차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삶이 두려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의 노력한 삶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생각하는 대신 악착같음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무지에서 나온 거짓 권력을 가진다. 삶에서 세 발짝 떨어져서 팔짱을 끼고 '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좀 설렁설렁 해' 하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은, 단 한번도 주어진 것 이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던 반증이라 봐도 좋을까. 그 순진함 앞에서 나는 '아동바동하지 않고서도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끝없이 떠오른다. 아주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누군가에겐 그냥 당연한 권리 그 다섯 발자국 뒤쯤 섰고, 끝없이 정진하거나 무너지지 않으려 발버둥 친 인생은 실패가 불가능한 인생에 의해 쉽게 비웃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독일어를 배우며 겨우 출발선에 서기 위한 레이스를 시작한 우리는, 시험을 위해 안전한 불평을 하는 법을 배운다. '소비자 권리' 하에서 되거나 되지 않는, 결코 탈이 나지 않을 불평을 편안한 집에 앉아 하는 일. 진짜 불평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려도 좋다. 진짜 삶 또한 눈 감아버려도 좋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꿈꿨던, 내가 가진 크고 작은 것을 내려놓고서 오기로 결심한, 선진국에 있으니까.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어, 꿈을 이루는 건 까다로워서, 비용을 치렀고, 잃어버린 것이 있고, 건너고서야 알았던 건너는 지도 몰랐던 다리들이 있고, 설레고 즐거울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만큼 설레지 않아도, 그래도 행복은 우리 꿈이 실현되었을 때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니까…….' <Thank Goodness, 뮤지컬 위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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