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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먀우 Dec 19. 2020

자아라는 배

한국인은 절대 알 수 없는 독일인들의 자아

나는 종종 한국인과 독일인의 의사 결정 과정과 커뮤니케이션을 배와 거기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유하곤 한다.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로서의 한국인은, 커다란 하나의 배에 올라탄 여러 명의 선원들이다. 하나의 커다란 배는 그 안의 구성원들이 모두 동의를 하건 말건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각각의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 모든 영역에 관여하진 않는다. 의사 결정권자가 누구고, 어떤 논리 구조를 바탕으로 배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이 되었는지 하는 문제를 구성원 모두가 나누지 않는다. 모두가 행선지에 동의하고, 공동의 목표로 생각한다면 이상적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배는 한 방향으로 간다. 한 배를 타는 데 익숙한 이들은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견디는 데도 익숙하다. 이 의견에서 벗어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구명보트를 내리고 바다에 뛰어들거나, 선장과 둘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 뿐이다. 그렇지 않은 한은 승선 자체가 배 방향에 대한 일종의 동의로 여겨진다. 동의의 의사도, 거부의 의사도 명시적으로 밝힐 필요가 없다.


이에 반해 독일인들의 항해는 각자가 조그만 자기 배를 가지고 뭉친 배들의 연합이다. 각 개인은 각자의 배의 조타수이자 선장이므로, 배들은 끊임없는 교신을 통해 이 배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인지를 교환한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를 모든 배에 알리고, 서로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그 여러 척의 배는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혹은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 배를 타는 데 익숙한 한국인의 문법으로는, 그들은 쓸 데 없는 말을 참 많이 한다. 오로지 공동의 이해를 위한 개념 정의를 참 지지부진하게도 한다. 한국인의 시점에서는 그래서, 내가 빨리 일을 하러 갈 수 있게, 결론을 말해 줘 하는 상황들이 종종 발생하고, 당연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발화는 결론이 없다. 액션 포인트를 만드는 것보다 공동의 이해를 달성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황은 장단점을 가진다. 한국인의 방식은 효율적이고 공동의 목표를 간단하게 도달할 수 있지만, 각각의 개인이 공동의 목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그 자리에서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는지 고려하지 않는다. 후자는 공동의 이해를 가지고 보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지만, 그 합의를 이뤄내는 과정이 느리고 지난하다.


집단 안에서의 초기 전략 또한 차이가 난다. 한국인이 어떤 집단 안에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면, 독일인은 나라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은 내 역할에 따른 역할놀이를 수행하는 것에 익숙하고, 독일인은 어디에 가든 불변의 자아를 가지고 간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집단에 들어갔을 때, 한국에서 안전한 방식은 가만 있으면서 집단의 분위기를 우선 살피는 것이고, 독일에서는 자신을 알리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것일 것이다. 반대의 전략을 취하게 된다면 전자에서는 나댄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후자에서는 원래 수줍고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으로 포지셔닝되며 소리소문 없이 존재가 말살될 것이다.


서로의 토양이 너무 달라 서로는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인은 이 배에 탄 순간 너희의 방향성에 합세하고 동의하기로 했는데, 독일인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물으니 서로가 어리둥절하다. 한국인은 내가 모는 내 배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독일인은 남의 배에 승선해 남의 방향성을 따라간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는 서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고 대화는 평행선을 그린다. 한국인에게 자아라는 것이 만약 존재한다면, 역할들을 둘러싸고 희미하게 존재하는 안개 같은 것이다. 그 없이 존재할 수 없을 독일인의 자아는 경계가 명확한 돌덩이 같은 것이다. 한국인은 자신의 자아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아무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할 거라면, 독일인은 결코 이 흐릿한 자아의 경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것의 가장 큰 단점은, 문화적 맥락이 권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대다수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은 강제적으로 그들을 이해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는 반면, 그들은 나를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내가 그들이 아는 유일한 아시안인 독일인들은 내 말을 귀기울여 들으려 노력하는 경우에도 내가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 노력과 성의의 문제가 아닌 정서와 문화의 문제다. 가족, 친구에 대한 개념, 노력에 대한 가치,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도 개인의 가치관 차이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 애정을 가지고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말을 이해해 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 또한 슬퍼지는 쓸쓸한 날들이 존재한다.


나도 모르게 배를 받고 망망대해를 떠돌며 이 배의 운전법을 배우기 시작한 입장이라면, 낯선 배들과 교류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처음 보는 배들과 어떤 목표를 향해 항해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수적이다. 다른 배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다른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면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인맥 또한 필수적이다. 레퍼런스 문화로 이어지는 인맥은 그들 입장에서는 수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배가 해적선일 가능성을 줄여주는 안전장치로서 작동한다. 인맥 없이는 될 일도 힘들고, 인맥이 있으면 안될 일도 된다. 한국은 그에 비하면 사람들을 훨씬 덜 공포의 대상으로, 공평한 존재로 보고, 자기 홍보에 조금은 힘을 빼도 된다.


각자의 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배에 타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각각의 자아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시끄러워야 한다. 한국인의 발화란 대단히 기능주의적이라, 의미가 없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데, 이들 사이에서는 무조건 어떤 말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틀리거나 멍청한 소리,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라도 하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지만, 가득 찬 똑똑이보다 덜컹이는 빈수레를 훨씬 더 좋아한다. 아, 문제가 되는 발언만은 제외하고 말이다. 의외로 한국인들 중 인종, 성별, 정치, 종교적으로 위험한 바운더리에 대한 개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 발언들만은 차라리 가만 있는 게 낫다.


이것이 권력의 문제인지는 충분히 검증하지 못했는데, 내가 보고 들은 많은 독일인들은 '내가 말을 해서 네가 설득되지 않을 것을 아니까 우리 그냥 각자의 입장을 취하자'라는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끝없이 말을 해서 둘이 어떤 합의를 이뤄낼 때까지 말을 해야 하는 데스매치인 것이다. (아, 내가 무슨 말을 했더니 혼자 화가 나서 이 주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혼자 물러서던 독인도 있긴 했다. 무슨 내가 걔가 가진 인류애를 모독한 게 문제가 되었는데. 그 옆에 다른 애들은 다 신경 안 썼었으니 분명 큰 일은 아니었다.) 이 시국에 방역에 대한 태도 차이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도 길거리의 독일인이 마스크를 쓰지 않아요보다도 이런 문제가 클 것이다. 마스크를 쓰고 손을 잘 씻고 모임을 피하는 것을 유난하게 보면서 관두라고 설득하는 독일인을 반대로 설득하려 하는 지난하고 부진한 행위에 지쳐 그냥 날 내버려두라는 태도조차 실패한 고통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보고 들었다.


원하든 원치 않았던 기왕이면 배의 조타수를 잡게 되었다면, 다른 배의 선장들이 시끄럽다고 귀를 막을 때까지 화려하게 떠들어보는 건 어떨까.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다들 능력은 있을 거고, 모자라는 건 문화적 백그라운드에서 나오는 협상력과 자기 홍보력 뿐이다. 나를 홍보할 홈페이지를 만들고, 컨퍼런스에서 토크하고, 인종차별에서 오는 디버프 이상으로 시끄럽게, 후광 효과를 이용해 보라. 협상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 패를 챙기고 합당한 협상 카드를 내밀면 손해볼 것은 그 제안이 거부당하는 것 하나 뿐이다. 나타난 작은 배가 해적선일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 대해 투쟁하는 상태에서 하는 1인 항해는 제로 베이스에서 치고 나가기 쉬운 메리뜨가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상상했던 것보다 명확한 한계가 더 빨리 드러나 보일 거지만, 무엇이 가능한지 탐험하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인종차별을 체화하지 않는다면 분명 기회는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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