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노느라 돈이 없고)
독일 욕이 뜸했다. 귀국한 지 일년 가까이가 되어가면서 한국 음식을 먹고 도서관에 가서 한국어로 된 책이 이렇게 많아! 하고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리고 우리 동네 건물들이 눈에 익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포실포실 살이 찐 탓이다. 예전엔 유럽의 어떤 것을 봐도 다 똑같은 건물이네 하던 것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올린 동네 사진을 보면서 우와아 유럽같다 하기 시작했다. 아직 세금 환급 문제가 독일과 얽혀 있긴 하지만 (그리고 언젠간 어떻게 해야 하는 연금과) 유럽이 어찌 되건 상관없어진 탓에 독일을 진심으로 욕할 수 없게 되었다. 택배가 오질 않건, TV가 없더라도 매 달 2만원씩 방송 수신료를 내야 하건 상관이 없어진 탓이다. 이제는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택배가 신속하게 문 앞에 마법처럼 놓여 있고, TV 없다고 2,500원의 수신료를 끊는 멋쟁이가 되고 나니 세금 환급을 다섯달 째 해주고 있지 않은 8천키로 떨어진 땅의 일 쯤이야 그다지 상관 없는 일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 버린다.
하지만 아직도 털지 않은 독일 욕하는 초고가 잔뜩 남았다. 내 영혼이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서 핏발 선 절규를 외치던 시절 하루에 열 페이지씩 써나가던 그 글들이 아직 잔뜩 남아서, 뭘 적어뒀나 다시 읽어보니 제법 웃긴다. 거를 것은 거르고 다듬을 것은 다듬어 더 잊어버리기 전에 정리를 해야지. 그래서 오늘은 돈은 버는데 눈 씻고 찾아봐도 돈 쓸 곳이 없던 시절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4주간 휴가를 내고 한국에 들렀을 때, 여러 귀여운 잡화를 파는 샵 구경을 갔다. 수많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물건들에 눈이 휙휙 돌아가 행복해하는 나를 보고 친구가 안쓰러워하며 "독일엔 이런 거 없어?" 하고 물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귀엽거나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이면 독일에 없다고 보면 돼." 하고 대답했다. 친구는 내가 다이소에서 산 천원에 네 개 든 멜라민 티스푼을 보며 안쓰러워했다. 그 티스푼은 짙은 파란 색, 핑크색, 밝은 파란 색, 회색 같은 세련된 색깔이 네 개씩이나 구성된 엄청나게 세련되고 독일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찾을 수 없는 예쁜 제품이었다.
가끔 서울에서 일하는 친구랑 대화를 하면, 나는 돈 쓸 곳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한탄했고 친구는 돈 쓰고싶은 곳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오스나브뤼크와 서울 직장인 사이 대화의 간극은 인구 16만과 1천만 사이 숫자 만큼이나 아득했다.
내가 살던 오스나브뤼크는 인구 16만 5천이 살고 있는 독일에선 50위권 안에 드는 제법 큰 도시다. 독일의 소도시는 한국의 소도시와는 달라 인프라적인 측면으로는 갖출 것을 모두 다 갖추고 있다. 우리 동네에는 기차역, 스타벅스, KFC, 맥도날드 같은 세계적인 체인점들, 제법 큰 백화점 두어 개, 거의 모든 스포츠를 할 수 있는 수많은 여가시설과 운동시설, 방탈출 게임장, 실내 고카트장, 미니골프장, 실내 암벽등반장, 도시의 각 구석마다 워터 슬라이드가 딸린 수영장이 한 네 개 정도,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공연이 올라오는 극장 하나, 영화관 세 개, 대학(Universität)과 전문대(Fachhochschule) 하나씩이 있는 도시였다. 그 도시에서 돈 쓸 데가 없는 건 인프라의 문제는 아니었다. 미감의 부재에 따른 문제가 매우 컸다.
중요한 일을 제치는 게 아니라면 언제 출근하고 언제 퇴근하는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회사에 다니면서 늦게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다 보니 열려 있는 가게에 가는 것이 대단한 행사가 되었다. 열한 시 반에 출근해 여덟시 넘어 퇴근하는 일반적이지 않은 생활 패턴으로 살아가다 보니, 보통 저녁 일곱 시 혹은 여덟 시에 문을 닫는 쇼핑몰, 서점, 잡화점이 열려 있는 모습을 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저녁 여섯 시면 문을 닫는 대부분의 카페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유일하게 헬스장만은 늦게까지 열었는데, 헬스장이라도 다녀오면 밤 10시까지 여는 슈퍼마켓도 시간이 안 맞아 일주일 내내 슈퍼에 못 가기도 했다.
그렇게 평일을 보내고, 토요일엔 누워서 숨만 쉬면서 사라진 체력을 보충하고 나면 일요일엔 또 수퍼마켓을 포함한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모든 돈 쓸 곳이 전부 문을 닫고 마니 내 인생은 더더욱 자본주의 소비 생활과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우리 집 앞에는 일요일 오전에 문을 여는, 독일로서는 아주 드문 수퍼가 있어서 오전 중에 일어나 기력을 그러모을 수 있다면 장을 보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사는 한국 사람들과 '내일 장 보러 가야지' '내일 일요일인데요?' '저희 집 앞 수퍼는 열어서요' 하는 대화를 몇 번이나 주고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큰 맘 먹고 나가지 않는 한은 가게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기가 어렵지만, 가끔은 자본주의 냄새를 맡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집을 나서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무언가를 사야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나가서는 모든 의욕을 잃고는 빈 손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참 이상하다. 무언가를 사고 싶어서 나갔는데 물건을 보고 나면 그 아무것도 사고 싶지가 않다. 사려고 마음 먹은 것도 사기가 싫어지니, 당연히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고 싶어지는 물건도 없다. 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예쁜 물건이 단 하나도 없을 뿐더러, 아주 드물게 우와 싶은 물건들은 가격을 보고 영원히 마음 속 저편으로 밀려나고 만다. 가구 같은 게 아주 극단적이고 대표적인 예인데, 이케아가 유명해진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케아가 몇십만원 선에서 가구를 팔고 있을 때 이케아가 아닌 가구점 구경을 가면 테이블 하나에 수백만원씩 하고, 모든 물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5~10배 비싸기 때문이다. 그나마 반드시 필요하고 사야만 하는 물건들은 인터넷이 더 저렴하거나 다양해서, 오프라인에서 무언가를 살 만한 일이 정말 드물었다. 똑같은 물건, 예를 들면 WMF의 냄비 같은 경우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어본 압력솥 손잡이 하나 가격이 아마존에서 본 같은 물건의 손잡이를 포함한 냄비 전체 가격과 비슷했다.
가끔은 백화점 같은 데 옷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는데, 누군가 꽃무늬와 마젠타에 한이 맺힌 걸까? 하는 생각을 품고 돌아나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옷을 구경하러 왔는데 눈이 시려야 하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색각 세포의 구성 분포에 차이가 있는 걸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특히 여름 옷을 구경하게 되면 유교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가슴이 파이지 않은 옷을 찾기가 힘들어 자연스럽게 옷 구경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한동안은 갑자기 달리기에 꽂혀서 달리기 관련 앱을 들으며 열심히 달리던 때가 있었다. 앱에서 신발의 교체 시기와 올바른 신발 고르는 법에 대해 말해줘 신발 매장에 종종 구경을 가곤 했다. 원래 쇼핑 욕심이 없는 편이긴 하지만, 항상 3분 안에 신발을 전부 스캔한 다음 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하고 돌아나왔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한국으로 휴가갔을 때 15분만에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서 행복하게 독일로 돌아왔다. 한국에선 15분이면 끝날 적당히 예쁜 신발 하나 찾기에 독일에선 2년이라는 시간이 들었다.
사고 싶을 만큼 예쁜 아이템은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가끔 가게를 지나다가 오 저거 괜찮아 보이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아이템들을 보게 될 때가 있다. 독일에 온 직후에는 절대 없었던 일이다. 그 때마다 독일이 드디어 미감이라는 것을 갖추기 시작한 건지, 아니면 내 미감이 독일 수준으로 낮아져 버린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한번은 한국에 다녀온 한국인 친구가 새 신발을 신고 왔다. 오 괜찮다 예쁘다 하고 얘기를 나누는데, 친구가 한국에서 신발가게에 갔는데, 아무도 사지 않는 디자인이라며 할인을 해 줬다고 한다. 아무래도 파괴된 것은 내 미감인 것 같다. 교민 사이트에서 도무지 눈 씻고 찾아봐도 예쁜 옷이 없어서 직접 만든다는 한국인도 본 적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실은 답은 하나뿐인지도 모른다.
독일의 이 좋게 말해 실용주의고 사실상 그냥 구린 미감의 상태는 모든 것을 예쁘고 싶어하는 이웃 나라 프랑스와는 아주 다른 태도라, 얘네는 뭘 잘못 먹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정말 의문스럽다. 독일에게 미감이라는 필터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서 아무런 물건들을 들여놓은 것인지, 아니면 구린 물건만 들여오는 아주 특수한 필터가 존재해서 선별한 구린 물건들만을 가져오는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연락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