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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먀우 Oct 11. 2020

사회적 공백

맥락의 부재

독일에서 아시안으로, 아시안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맥락과 평가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거대한 공백 상태에 놓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아시안에게 내리는 평가는 '별로 해될 것 없는 착한 친구들' 정도가 일반적인데, 그런 사람들 있다고 들었어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유럽의 세계관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아프리카-중동을 잇는 세계관이 메인이기에, 아시아에 대한 뚜렷한 인식을 형성할 만큼의 지리적 역사적 근접성이 부족했다. 현재에도 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아시안이 적기 때문에 명백한 혐오도, 호의도 아닌 애매한 얼버무림만이 남아있다. 한국인에게 유럽이 대충 선진국이라고 생각되는 좋은 여행지 정도에 지나지 않듯 두 세계는 서로의 인식에서 아득히 달라 서로 섞이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의 실체를 알 이유 또한 없다. 내 머리 속 좋은 환상 세계 정도로만 남겨 두고 가끔 동경하고 또 도피하면 족한 것을 왜 굳이 사람 사는 세계로 끌어내리는 충격을 감당하겠는가.


나는 종종 농담을 섞어 유럽에서의 아시안의 위치란 비둘기 정도라고 말하곤 한다. 평소에는 길에 평범하게 돌아다니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데, 가끔 재미 삼아 놀래키면서 푸드덕 날아가게 만든다. 또 들어오지 말아야 할 장소에 들어오면 내보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 내 이 비둘기 설에 누군가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 하얀 비둘기들이지 그 회색 비둘기들이 아니다' 라는 말을 보탰다. 그들이 사랑하는 건 얌전하고, 착하고, 순종적이고, 수줍은 아시안이지 삶을 살아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평범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끝없이 평가를 받고 또 내린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사회적 계급, 권력, 성취와 같은 척도에서 자유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정상성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게임 잘 하는 한국인들이라 그런지 인생도 게임처럼 사는데, 삶의 모든 단계에 레벨과 스킬트리를 매기고 끝없이 티어를 평가한다. 독일인도, 미국인도 어떤 나이에 무엇을 성취했었어야 옳은 삶인지 검색엔진에 물어보지만, 그들이 30살, 35살, 40살을 불안해 할 때 한국인은 일년 단위로 삶을 검색한다. 한국인은 끝없이 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기가 옳은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며 자신을 평가한다.


무엇이 사회적 맥락 속의 자신이고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 삶이 삐그덕대는 순간들이 찾아오기 전까지 완벽하게 구분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내가 가진 불이익과 이익을 명확하게 알아내고 받아들일 이유와 용기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없다. 하지만 독일에 가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던 한국적 맥락은 소멸하고, 사회와 무관한 나라는 맥락을 새로 써야 하는 중대 업무를 마주하게 된다. 가족과 같이 내 맥락을 떼서 함께 옮겨 온 경우는 그나마 재정의 과업의 일부가 면제되지만, 혼자 온 경우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나 자신은 어디까지나 나를 따라간다. 최종 학력, 능력, 국제적으로 인정되고 통용되는 여러 가지 업적과 실력들, 상황에 대한 적응력, 언어능력, 성격 같은 것들은 새로운 환경에서도 내 자산이 된다. 하지만 무슨 대학을 나왔는지, 가족, 알던 사람들, 사회적 평가와 같은 모든 사회적 콘텍스트 속에서 나를 정의하던 성질들은 나에게서 제거된다. 그들이 마련한 사회적 맥락은 대체로 매우 편협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독일로 정상적으로 비자를 받고 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편협한 포지션에서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회적 맥락을 잃고 나와 맥락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차적인 즐거움과 고통들이 수반된다. 사회적 맥락 속에서 내게 주어진 권력이었던 사람들은 그 낙차에서 상당한 박탈감을 느낀다. 하지만 내게 붙어 있던 것들이 족쇄였다면 그 맥락이 부숴진 공허는 자유가 된다. 이 공백은 꿈의 토양이 되기도 한다. 나를 지지해주는 것도 없지만, 나를 가로막는 것도 없다면, 나는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꿈꿀 수 있게 된다. 실행을 하고,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사회에서 실제로 어디까지 지지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적어도 박탈감과 절망 외에 상상을 직접적으로 속박하는 것들은 사라진다. 내 주변 환경이 나를 속박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내 꿈과 상상을 눈치채지 못해서 먼저 와 잡아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문화 차이로 취급되는 그 얄팍한 세상 속에서 나라는 인물의 입체성을 유지하며 건강하고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국가적, 시대적 콘텍스트를 떠나 나 자신만의 맥락을 발굴해 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사람은 항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고 새로운 위치를 탐험한다. 내 입장이나 신분이 변했는데도 사회적 평가는 여전히 같거나 공백 상태에 머무른다면 바뀐 세상에 따른 자아와 사회 속 역할을 재정의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 사회가 나에게 제공하는 역할과 겉껍질을 벗어나 '나'에 대한 본질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서는 이 모든 낯선 과정들을 헤쳐남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기는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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