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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Sep 10. 2020

순간을 사는 방법은 아이가 한 수 위


#무기력과 싸우다

어쩌다 맥주를 한 캔 먹는 날엔 잠시 술기운이 올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랐지만

술기운이 가라앉으면 풍선처럼 부풀었던 내면은 이전보다 더 작아지고 쪼그라들었다.

왜 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과연 어디에서 이 지독한 인연을 끝낼 수 있었을까? 돌아봐도 소용없는 과거를 자꾸 거슬러 올랐다.

마음의 흐름은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갔다. 길고 어두운 무기력을 지나면 지독한 증오로 향했다.

눈썹을 바짝 올려 도끼눈을 뜨고 독설을 내뱉었지만 그것은 곧 나에게 돌아왔다. 내 입으로 내배은 날카로운 저주도 나의 가슴을 찔렀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오전 금식과 금주를 결심했다. 

일주일 뒤, 한 달 뒤, 내년까지 앞 날을 걱정하기보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의 365일 중 너무 많은 날들을 나쁜 감정들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자존심

그는 남편이자 아빠였지만 가장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들)는 오직 그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그는 펼쳐보지도 뜯어보지도 않은 주민세와, 밀린 관리비 고지서를 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그건 그야말로 '내 사정'이었다.

눈만 뜨면 배가 고프고, 틈틈히 간식을 찾는 아이들이 철없어 보였고, 밉기도 했다.(솔직하게는 꼴보기 싫었다)

그런 감정이 가득찬 그 순간 하필 아이가 말을 꺼냈다. "엄마 내 친구 호운이는 태국, 하와이, 사이판에 가봤데"

냉큼 그 말의 꼬리를 자르고 덧붙였다 "그래! 그 아빠는 참 자상하더라!"정적이 흘렀고 콧구멍에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아이는 유치한 엄마의 대답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엄마가 꼭 데려갈께. 2년 안걸릴꺼야. 약속할께"

먹고 사는 문제. 어제와 오늘 그 몇 시간 사이에 그걸 걱정하게 된것도 기가막힌데 아이들은 나에게 온갖 요구사항을 당당히도 얘기한다.

그날 마트에서 그간 망설이다 사지 않았던 각종 먹거리들을 고민없이 척척 카트에 담아 넣었다. 머릿속으로 누적 계산액을 어림잡아 계산하지도 않았다.

결제를 하는데 아이가 눈이 둥그레졌다. 

오는 길에 주유를 하자 미간을 찌뿌리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우리 오늘 10만원 넘게 썼어~"

나의 현금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결연하게 말했다 "일시불이요"


#순간을 사는 방법은 아이가 한 수 위

태풍에 갇혀있던 우리의 영혼을 위해 가까운 바다를 찾았다.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풍덩 몸을 담그는 아이의 무모함을 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물 위에 연신 첨벙거리는 아이의 검은 실루엣이 보였고, 조용한 바닷가엔 깔깔깔 웃음소리 퍼진다

"순간을 사는 방법"은 아이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차가운 물에 발만 담갔는데 시원함이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참 서있는데 저무는 해가 내 얼굴을 비춘다. 매직 아워 Magic Hour가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매직 아워가 내려앉은 내 얼굴은 지금 최고로 아름다울 것이다.

잘 놀던 아이들이 갑자기 바다 끝, 태양 가장 가까이서 석양을 보겠다고 한다.  

제방을 따라 울퉁불퉁한 돌을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에 습관처럼 불안과 걱정이 올라왔지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순간을 사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배우는 중이다. 

때로 우리는 평평하고, 어떤 걸림돌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는데 '안전한 곳'이 있긴 한 걸까?

저무는 해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사뿐사뿐 걷는다. 울퉁불퉁한 돌길은 무대이고, 태양은 나를 비추는 조명이다


행복한 순간만 기억하면 된다. 그것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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