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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Sep 15. 2020

헤어지고 싶지만 치킨은 먹고 싶어

#헤어지고 싶지만 치킨은 먹고 싶어

그가 아이들을 위해 치킨을 사 왔다. 테이블 위에 치킨 박스를 올려놓자 아이들은 '아빠 최고'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와 함께 나의 의젓한 딸, 나의 귀여운 아들이 안방에 있는 내게 먹어보란 한 마디 없이 쩝쩝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쩝쩝 소리와, 유혹적인 치킨 냄새가 나의 깊숙한 자존심과 계속 싸운다.

불 꺼진 방에 홀로 누워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식탁으로 걸어가 덥석 치킨을 집어먹었다. 

그와 나의 관계는 현재 내일모레 곧 이혼을 앞둔 부부, 며칠 전 온갖 욕을 해대며 죽일 듯이 싸우던 사람들이지만 그런 관계와 상관없이 치킨이 먹고 싶었고 난 참지 않았다.

사랑=오래 참음, 이별=안 참음

나도 안다. 이런 상황에선 먹고 싶어도 아이들이 갖다 줘도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엄만 먹기 싫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식탁 옆에 서서 치킨을 두 조각째 집어 먹을 쯤 그가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 앞에서 '내 돈으로 사 온 거니까 당신은 먹지 마!'라고 말하지 않아 고마운 마음이 든다.



#마음이 고인 곳

미움이 엄습할 땐 차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온갖 나쁜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TV에서 노사연이 이무송이랑 부부싸움을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머리맡에 커다란 액자가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해 "결혼까지 했는데 설마 그런 마음을?" 의아에 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죽어도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경험하는 중이지만 그런 미움으로 힘든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작은 미운 감정에 이 사건, 그 사건, 2년 전 사건, 10년 전 사건이 더해져 눈덩이처럼 커져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10년간의 수많은 일들 중에 내가 '피해자'였던 사건들만 쏙쏙 뽑아져 그 감정이 고스란히 올라왔다.

마음이 고인 곳엔 처리되지 않은 미움이 썩어지고 있었다.



# 흐르는 물에 던진것은 도토리가 아니라 미움

'오늘 하루 잘 살기'에 이어 또 다른 결단이 필요했는데 바로 '사랑하기'였다.

사랑할 만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욕지거리를 하고, 발길질을 하고, 물건을 던지던 그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걸까?


아이들과 저녁 산책을 나선다. 평소에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엔 전날 내린 비로 콸콸 시원한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익기 전에 떨어진 파란 도토리를 주워 계곡으로 던지는 놀이를 한다.

가만히 물을 내려다 보던 나는 그 놀이에 합류했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먹가득 주워 계곡에 한 알씩 던졌다.

말없이 그러고 있자 아이들이 묻는다 "엄마 뭐해?"

"엄마 지금 미움을 던지고 있어"


흔해 빠져 단어 만으로는 가치 없어 보이는 용서사랑을 내 안에 가득 채우는 것에 도전한다.

돌고 돌아 발 밑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기분이 이럴까?


젖은 아이들 머리를 빗겨주고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아이에게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여전히 아빠로서 자리를 지키는 그가 고마웠다.

내 안에 모든 독기가 빠지는 날 추구하고 진행하던 모든 일들이 '잘'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공이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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