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 이불 밖으로 나오는 연습을 하는 짧은 여정은 끝이 났다.
그 시작은 '실패 불가능한 성취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굳이 리스트를 만든 건 나의 무기력이 '너무 큰 목표'들만 세우다 반복된 작은 실패, 그로 인해 쌓인 좌절감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단히 가진 게 없어도 어디서나 당당했던 나였다고 믿었건만, 어느새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작은 성취감들을 느끼고 싶었다. 나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 적기 시작한 것이 '22가지 성취리스트'다. 내용은 특별할 것 없었다. 누가 보면 "뭐 이런 걸 리스트까지 적어?" 할 만큼 일상적인 일들이다. 하지만 무기력이 몰려왔을 때 가장 먼저 무너지고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다름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성취리스트는 무너진 일상을 재건하는 일종의 '공사'와도 같았다.
22개의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천천히, 조금씩 용기와 활기가 다시 느껴졌다. 어느 날은 탄력을 받아 두세 개를 한꺼번에 해내기도 했다. 물론 늘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가장 오래된 악습관을 바로잡기 위한 '1시 반 전 취침'과 '8시 이후 금식'은 여러 번의 실패 끝에야 성공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듯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가 땅이 꺼질 듯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져 다시 일어나 훌훌 털어내고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모든 걸 다 해내겠다는 과한 욕심, 앞서가는 이들을 보며 나를 채찍질하던 조바심, 쉴 줄 모르고 회전하던 생각들. 무질서와 불균형으로 채워진 일상의 결과는 무기력과 상실이었다. 나아갈 생각은 들지 않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억지로 의미 부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가끔 뉴스를 보며 인간의 이기심이 부른 비극들을 접할 때면 "인간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가"라는 허무주의에 깊이 빠지기도 했다.
존재를 부정하면 모든 일상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에 의문을 품은 게 나뿐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가 각자의 답을 내놓았다. 인간은 아무 목적 없이 태어났지만, 그렇기에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주체라고 말한 사르트르.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로 살 수 있다고 본 하이데거. 영원히 돌을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더라도 그 운명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돌을 굴리는 '반항'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은 카뮈. 신은 죽었으니 이제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이 순간을 놀이처럼 즐기라고 말한 니체.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극한 상황에서도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가 인간에게 남아있다고 이야기한 빅터 프랭클까지.
이들의 답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결국 그 모든 사유의 끝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22개 성취리스트를 실천해 나가는 여정에는 철학자들 같은 거창한 통찰이나 메시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확실한 것은, 존재의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나는 기꺼이 살아갈 것이며 일상에 대한 의지가 다시 생겼다는 점이다. 설령 다시 이불속으로 눕게 되더라도, 금방 다시 나올 수 있다는 용기와 자기 확신도 함께 얻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오늘을 살아갈 의지가 충만하다. 삶에 대단한 의미가 없으면 좀 어떤가. 길가에 홀로 핀 꽃이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고귀한 것처럼, 나의 하루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 오늘을 끝까지 응시하며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나의 내일도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라는 담담하고도 단단한 자세로 맞이해 본다.
*그동안 함께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포시 누른 라이킷, 정성스럽게 남겨주신 응원 한마디, 조용히 읽어주신 모든 분들. 일상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 삶의 의미를 잃고 허무함에 빠져 계신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의미 없어도 괜찮습니다. 함께 오늘을 잘 살아내 봐요. 아무도 평가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