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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NC 28731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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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in Oct 28. 2024

오전 11시에는 와인이지

헨더슨빌의 천사들 (2)

 인생은 만남이며, 좋은 친구는 축복입니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은 아주 행복하고 근사한 일입니다. 어땠을까요? 이런 친구를 타국, 낯선 땅 헨더슨빌에서 만났다면요.


 힘든 시기에 짠하고 나타나  햇살이 되어준 Jessica, 내가 했던 사소한 말들을 꼼꼼히 기억해 두었다가 도움 되는 정보를 쓰윽 공유하거나,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슬쩍 데려가 주는 그녀는 내가 만난 헨더슨빌 천사 중 한 명이다.


 어쩌다 보니, 금요일 오전은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Girls Hour로 자리 잡았다. 제시카와 함께 있으면 속 깊은 이야기도 막힘없이 영어로 술술술 나온다. 오전 11시에 마시는 레드 와인 한 잔에 취했을까? 순간 제시카가 케이트 윈슬렛으로 보인다. 웃게 해 줘서, 내 이야기 잘 들어줘서 고마워.


 둘째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 근처 Flat Rock Bakery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이 협소한 유명 베이커리여서 일찍 와서 오픈을 기다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 8시 오픈을 기다리며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 여러 번 왔었는데 이제야 읽어보는 이야기다.  테이블 중간에 나무가 있어서 시야를 가리네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그늘과 쉴 곳을 주는 고마운 나무라고 따로 설명을 적어놓은 빵가게 사장님의 세심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정말이지 나무의 커다란 그늘이 없었더라면 신선한 공기는 느끼지도 못하고,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고 식사를 할 뻔했는데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무 덕분에 야외 테이블이 근사한 곳으로 변신했구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야 고맙다.

 돌아보면, 내 주변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다. 스스로를 오지랖이 넓다고 하지만 남들의  막막함과 외로움과 힘듦을 깊이 헤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들. 어제도 오늘도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팔을 벌려주는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참 고맙다.


  제시카 역시 헨더슨빌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존재이다.  그녀의 그늘은 솔솔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그녀의 나무 아래 쉬고 있으면 내 마음은 편안해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이들의 짧은 겨울 방학이 오기 전에 여자들끼리 근사한 오후를 보내자고 제안을 했다. 우리는 집 근처 티 샵에서 애프터눈티를 즐기고, 잠시 제시카 집에 들렀다. 그녀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전해주고 나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하나하나가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어, 단순한 장식이 아닌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제시카의 큰언니가 직접 바느질해서 조카들에게 선물한 것들, 외할아버지가 제시카의 엄마에게 만들어 준 것들, 제시카의 남편과  자신이 어릴 때 쓰던 크리스마스 스타킹 등등 물건들 하나하나 오래된 물건이고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그 장식들에 깃든 정성과 추억이 따스하게 전해졌다. 제시카가 장식들에 대해 설명할 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뿌듯함과 행복함을 보며 그녀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며 제시카의 집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도와주러 갔을 때였다. 그녀가 내어준 간식들은 참으로 새로웠다. 크림치즈+레드페퍼 젤리+비스킷 조합이라니 어떤 맛일까? 고소한 크림치즈에 달콤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젤리에 비스킷을 찍어 먹었더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제시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라며 내가 분명 좋아할 거라며 권했는데, 한 입 먹자마자 미국식 간식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또,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나온다는 에그녹에 위스키도 내어주었다. 에그녹의 달콤하고  크림 가득한 맛에 브랜디 위스키의 독하고 알싸한 풍미가 어우러져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런 걸 왜 진즉 몰랐을까?' 오로지 내년에도 이 조합을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녀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도우며 느낀 또 한 가지는 미국 엄마들의 놀라운 부지런함이었다. 할로윈이 끝나자마자(할로윈 장식에는 어마어마한 공이 들어간다) 집을 땡스기빙 장식으로 꾸미고, 땡스기빙 디너를 끝나자마자 곧바로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어 장식을 준비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입이 떡 벌어졌다. 아이들을 위한 선물 준비와 포장, 친구와 지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고 보내는 일, 그리고 아침마다 '엘프 온 더 셀프(Elf on the Shelf)'를 집안 여기저기로 옮기는 놀이까지, 아이들이 깨어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왜 미국에 패스푸드점이 많은지 쪼금 이해가 갔다.


 제시카와 함께 Main Street의 기념품 가게와 크리스마스 용품 가게를 둘러보고, 마침내 기다렸던 Shine에 들어가  와인 슬러시와 햄버거를 맛보았다. 햄버거와 와인 슬러시 모두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었다. 그날 그녀는 나의 오후를 근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가 함께 거리를 걸으며 나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If I live in a strange place, I will need a friend.

 아… 제시카는 정말 내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 이 낯선 곳에서 외롭고 쓸쓸할 때 가족 아닌 나의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정말 필요했어.’



 제시카와 처음 만난 건 교회 Youth group 활동 중 하나였던 볼링장데이에서였다. 아이들을 픽업하러 온 부모들이 볼링장 뒤편에 앉아서 아이들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제시카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했고,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첫째 아이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와 꽤 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눈앞에 닥친 여러 일들을 해치우느라 그녀를 잊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빠 보였지만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전화번호부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문자를 보냈다. 대부분 형식적인 답변이 왔고 제시카가 깜짝 놀란 듯 유일하게 길게 답장을 해주었다. 그리고 새해에 시작하는 교회의 모닝커피톡 (수, 아침 9시 근황토크, 주제 아티클 또는 책 읽어오고, 성경 말씀 기도)에 초대했다.

 내가 모닝커피톡에 갔던 이유는 오로지 제시카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다. 첫 모닝 토크가 끝나고, 제시카와 첫 브런치를 함께 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몇 번의 텍스트를 주고받고, 긴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전, 제시카는 모닝 와인을 즐기자며 와이너리로 나를 데리고 갔다. 돌아가신 제시카의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전 11시의 와인 한 잔을 앞에 두고 우리는 서로의 삶을 천천히 깊이 나누었다.

 그 후, 제시카는 독립기념일 같은  미국의 큰 휴일마다 우리 가족을  그녀의 집으로 초대해 미국 사람들이 할로윈부터 땡스기빙데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준비하고 즐기는지 직접 경험하게 해 주었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와 함께 하면서 나도 이곳의 일상에 점점 스며들었다.


차갑고, 도도하고, 냉정한 곳인 줄 알았는데

따스하고 순박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다.

어려움이 생기면 어떻게든 도움 주려고 애쓰고

자신의 작은 도움이 올바른 선택이 됐음에 뿌듯해하고

아낌없이 선행을 베푸려 애쓰며 정으로 똘똘 뭉쳐진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Flat Rock, Hendersonville.


 한국에 돌아와서 헨더슨빌에서 보내온 엽서 한 장을 받았다.

Greetings from the Mtns! I’m sure you have many photos but I thought a familiar coner would be nice to see. I hope everyone is adjusting and thrivig. We miss all of you. We’re so glad you settled into your new home and that the chicken has been fantastic to eat : ) Best wishes&Friendships.

❤️Jes, Elle, Lulu and Brad


제시카야 나도 네가 많이  보고 싶어! 많이 많이 ❤️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하고 헤어진 기분이야.

벌써 눈시울이 붉어지네.

너도, 헨더슨빌도 잘 살고 있어.

나도 잘 살고 있을게.

So long, Hendersonville.

See you again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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