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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in Nov 28. 2021

다정한 ‘우리’씨의 차별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우리’라는 단어에 온도가 있을까? 다정한 ‘우리’라는 단어로 친밀도를 가늠할 수 있기에 ‘우리’에 포함될 때 느껴지는 온도는 추운 겨울날의 핫팩처럼 따뜻하고 아늑하고 ‘우리’에 속하지 못할 때 전해지는 온도는 북극의 빙하만큼 차갑고 싸늘하게 느껴진다.


 관계의 척도로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경계와 차별이 존재한다. 우리’에 배제될 때 느껴지는 서운함은 소외감이 된다.


 차별은 일상 곳곳에서 일어난다. 편안한 모국어의 환경을 벗어나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차별은 더 크게 다가온다. 언어로 인해 체감하는 ‘우리’와 '너희'의 차별의 장벽은 두터웠다. 하루는 스타벅스에서 서툰 영어로 soy milk를 넣어달라고 주문을 했다. 나의 영어 발음을 들은 직원이 못 알아듣겠다는 듯 양손을 치켜올려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며 날카롭게 “what?!”이라고 쏘아붙였다. 예상치 못한 점원의 날카로운 반응에 당황하여 나는 황급히 “sorry”라고 대답했다. soy milk를 넣어 달라고 했을 뿐인데 이마에 川자를 그리며 왓?!으로 정색할 일인가? 라며 또박또박 따져 묻고 싶었지만 ‘너희’ 나라 말을 유창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나의 서툰 영어를 먼저 탓하며 말을 삼켰다.

 

 해외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사이에 있을 때는 말이 통하니 차별이 줄어들 것 같지만 오히려 더욱 강렬한 ‘우리’의 선긋기가 느껴졌다. 미국에서 대부분의 한국인은 한인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교회를 다니는 ‘우리’ 교인들과 달리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나는 물 위의 기름처럼 동동 떠 있는 다수의 ‘우리’와 섞이지 않는 ‘낯선 이’였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경계를 민감하게 느끼다 보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속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의 설움을 알고 있다면 누구보다 차별에 민감한 촉수를 가지고 있을까? 내 경우에는 꼭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태도를 취했다. ‘우리’라는 주류에 속해 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차별인 줄도 모르고 차별을 했다. 최소한의 저항인 무표정을 선택할 때도 주위의 시선을 살피고 쓴웃음으로 대신했던 소심했던 나는 사라지고 주류의 ‘우리’가 된 나는 나의 의견을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일 줄도 알았다.


 서울시 역사 해설가인 친구가 있다. 한국에 산지 햇수로 10년째인 그녀는 중국 동포다. 중국에서 10년 동안 관광 통역 가이드를 하는 동안 직업상의 필요로 중국사 공부를 하며 한국사에도 약간의 관심을 두었지만 , 중국에서 한국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긴 후 관광통역안내사로 진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한국사에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한국사를 혼자 공부하기에는 어려움을 느꼈던 그녀는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역사 인문학 강좌를 접하며 한국사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갔다. 집 근처 복지관에서 6개월 동안 역사 수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서울 시내 박물관의 무료수업을 듣기도 하며 역사에 관련된 수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현장답사를 가야 할 때면 그녀의 9개월 된 아기를 아가띠에 업고, 때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한국사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아이가 17개월이 되었을 때 출산과 육아로 미뤄졌던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고 이내 합격의 결실을 맺었다. 관광통역안내사에 합격한 후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우연히 서울시 역사 해설사 시험에 대한 정보를 듣고 그녀의 가슴은 뛰었고 결국 서울시 역사 해설사가 되었다. 그녀는 올해로 만 5년째 서울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한국사 공부에 열정을 쏟으며 열심히 공부했기에 '우리' 한국인보다 더 한국 역사를 자세히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물 흐르듯 막힘없는 역사 해설을 듣고 “선생님! 이방인이잖아요, 한국인보다 한국 역사를 더 잘 알아서 제가 부끄럽네요.”라고 했다. 그녀를 칭찬하고자 했던 의도였지만 차별이 밑바탕에 깔린 칭찬이었다. 아무리 한국에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 그녀가 과거에도(중국에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선조 대대로 한국인인 한국 동포이지만 ‘우리’ 한국인이 아닌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정체성이 중국인인) 영주권자 외국인이잖아요 라며 마음속으로 경계를 그었다.

 

 나의 발언을 듣고 그녀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심지어 한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는 그녀에게 “왜 한국 시민권을 신청 안 하세요? 자격이 충분한데요!” 그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그녀가 당연히 한국 시민권을 원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사실, 그녀의 연로하신 부모님이 중국에 계셔서 갑자기 그녀가 중국에 들어가야 할 때를 대비하여(국적을 바꾸면 중국 비자를 발급하기 위한 시간이 걸리니) 굳이 한국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고 중국 국적을 유지한다고 했고, 한국 시민권이 없어도 특별하게 사는데 불편한 점도 없다고 했다.

 

 간절하게 한국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건만 나는 왜 그녀가 한국 국적을 획득하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그녀에게 어떤 차별이나 우월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우리' 한국인의 입장으로 그녀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말았다. 선량한 나의 의도였지만 그녀의 마음에 불편함은 없었을까 헤아려본다.

 그녀는 분단된 대한민국의 한국인보다는 통일 한국의 조선인이길 바란다고 했다. 그녀가 한국에서 얼마만큼의 세월을 살아야 나는 그녀를 이방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도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 조선족인 그녀를 판단하고 내린 나의 착각이었다.


 ‘우리’ 사회는 우리와 다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하다. ‘우리’에 배제된 이들의 미묘한 차별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도록 안전하게 소신 발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엇보다 먼저 조성되었으면 한다. 공론의 장에서 ‘우리’와 다름을 경청하는 것부터가 평등 사회를 향한 작은 한걸음이 될 것이다.

 

 무심코 내뱉었던 ‘우리’라는 말에 내가 소외를 느꼈듯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입장에서 내뱉는 말에 차별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차별을 당할 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이다. 우리와 너희 사이의 넓은 간격이 좁혀져 우리 사회 구성원 사이에 차별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아마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어려운 미션일지도 모르나 다수의 다정한 ‘우리’씨가 모여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성찰하고 곱씹어 보며 노력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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