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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Dec 31. 2020

제주 여행 (feat. 무계획 남편투어)

나는 매사 성격이 급하고, 계획적이며, 추진력이 있고, 남편은 매사 느긋하고, 무계획적이며, 결정장애가 있다.

그런고로 우리집 여행은 거의 모두 내가 준비하고, 남편은 여행지에 가서 "우리 오늘 어디 가?  뭐 먹어?"를 묻는 상황이 매번 반복되었다. 급기야 피로감을 느낀 내가 이번 제주 여행에서는 남편에게 여행책자 한 권을 들이밀며 "숙소, 비행기표는 다 예약했으니 여행 스케줄은 모두 알아서 짜. 난 일체 관여 안 할 테니까."하고 엄포를 놓았다. 내 퍼런 서슬에 놀란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남편투어는 시작되었다.

# 첫째날. 김포공항

아이가 귀가 먹먹하다길래 입을 벌리라고 했더니 진지하게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


#제주의 첫 끼니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점심 때. 남편투어의 총책임자인 남편에게 "우리 점심 뭐 먹어?" 했더니 KFC 가겠단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다. 남편은 길 가다가 KFC만 보이면 무조건 들어간다. 

What? 제주에서의 첫 끼니를?


다행히(!) 제주시내에는 KFC가 없었다. 남편이 실망하는 틈을 타서 얼른 숙소 근처 식당을 검색한 뒤 슬쩍 "그냥 숙소 근처 가서 먹는 게 어때?"라고 말하고 네비에 내 맘대로 목적지를 찍어버렸다.

식당에 와서도 결정장애가 있는 남편이 "나 뭐 먹지? 초밥 먹을까? 알밥 먹을까? 아아~ 나 뭐 먹지?"하고 갈등했으나, "회덮밥!"이라는 나의 낮고, 단호한 한 마디에 상황종료.

회덮밥은 회가 싱싱하고 두툼해서 남편이 만족하였고, 내가 주문한 해물뚝배기도 시원했다. 게다가 다 못 먹는다는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추가로 시킨 고등어구이는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을 완벽히 구현해낸 것이었다. "남편! 선택이 탁월한데?"하고 칭찬했더니 기분이 좋은지 콧평수가 넓어진다. 아아, 쉬운 남자여!


#곽지과물해수욕장

괌 퀵실버에서 5달러 주고 산 타이어 모양 튜브.

우리 가족의 각종 물놀이에 동원되었다가 제주 곽지과물해변에서 그 소임을 다 하고 잠들다.

안녕~ 햇빛 받으면 금새 뜨거워지는 검정색 튜브였지만(그래서 5달러에 매대 위에 누웠는지도 모르겠지만) 넌 참 좋은 파트너였어.


#저녁식사

물놀이와 휴식 후 숙소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식당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관광지와 맛집을 고집하지 않는 여행이란 얼마나 평안한가. 예약도, 운전도, 인파도, 긴 기다림도 없이 자유하다. 아무 토핑도 없이 토마토소스에 비벼내기만 한 스파게티를 아이가 얼마나 잘 먹던지... 오랜만에 흐뭇했던 저녁.


#둘째 날. 동네 카페

오전 10시. 야행성인 남편과 아이는 아직까지 침대에서 뒹굴고, 여행만 오면 잠이 없어지는 나는 7시부터 눈이 떠져서 혼자 아침 차려먹고, 어젯밤 읽다 만 소설도 다 읽고, 방정리에 나갈 채비까지 마치고 나니 할 일이 없다. "잠깐 동네산책 하고 올 테니 그 안에 준비를 끝마치고 있어!" 엄포를 놓은 뒤 숙소를 나섰다.

걷는 건 자신 있었는데 날이 더워 그런지 나이를 먹어 그런지 몇 걸음 못 걷고 흐느적대다가 문 열린 동네카페로 뛰어들어갔다. 일찍 출근해계셨던 사장님이 개점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은혜롭게 주문을 받고 자리를 내어주셨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달콤쌉싸름한 티라미수 한 입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오전에 제주오일장에서 주전부리를 실컷 하려고 아침도 가볍게 먹었는데 이 시간에 여기서 티라미수라니! 하지만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아마도 남편과 아이는 지금쯤 나갈 준비는커녕 잔소리꾼이 없어진 틈을 타서 실컷 배짱이 노래를 부르고 있겠지. 모두가 행복한 아침이다.


#제주시민속오일장

벼르던 오일장에 왔다.

참 싸다, 팬티 한 장에 오백원이라니! 이 시장파괴적인 가격 무엇...혹시 중고인가 싶어 조심히 다시 내려놓았다.

아이의 노란 머리에 어울리는, 세 보이는 팔찌를 득템했다. 제주오일장에서 인디아산 공예품이라니 약간 거시기하지만 이로써 롹커 패션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산 지 30분 만에 잃어버렸네그려. 아들이란!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탐색하고, 나는 느긋이 뒤따라가면서 가끔 뒤돌아보는 아이에게 미소를 짓는 그런 장면.

현실은 "언제까지 가야 돼? 다리 아파. 놀이터 가고 싶어. 수영장 가고 싶어."를 연신 외치는 아이에게 "이것만 끝나면 음료수 사줄게. 저것만 끝나면 유투브 보여줄게." 어르고 달래는 일의 연속인 것이다.

"얀마, 이웃집 중빈이(오소희 작가님 아들. 실제론 안면 없음 주의)는 너만할 때 라오스도 가고! 어? 터키도 가고!"라고 외치고 싶지만 어쩌냐... 엄마도 오소희 작가가 아닌걸. 아이를 데리고 세계를 누비며 살고 싶다가도 사교육과 학군지 입성을 두고 고민하는 지극히 평범한 대한민국의 엄마인걸.

언제까지 채소만 봐야 하냐는 채근끝에 얻어낸 식혜를 물고 시장통을 떠나는 우리집 7세 아동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중문색달해수욕장

남편이 아이의 서핑강습을 예약했다. 위험할까 걱정되어 내심 말리고 싶었으나 이번 여행스케줄은 남편에게 일임한 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변에 앉아 두려운 마음으로 첫 강습을 지켜보았는데 웬걸... 첫 번부터 바로 균형을 잡고 일어나 파도를 타기 시작하더니 2시간 강습 내내 거의 넘어지지 않고 파도를 탔다. 뭍으로 나와서 "엄마, 서핑하는 법 몰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더니 내일 또 하겠단다. 장하다.


#이자카야

일본제품 불매운동 중인지라 일본요리점도 되도록 가고 싶지 않았는데 밤늦은 시간에 슬리퍼 찍찍 끌고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문을 연 식당이 여기밖에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방문한 이자카야 식당.

쇠고기 스키야키에 카다이프 새우를 안주로 맥주 한 잔 하고 있으니 여행 온 감회가 새롭다.


#낮에 오일장에서 산 체리

제주오일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허름해서 맛집일 것 같았던 식당의 고기국수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없었고, 체리는 덜 익었다.

어쩌면 나같은 뜨내기 여행객에게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매력이 있는지도 모른다(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길..).

암튼 내게는 그냥 평범한 재래시장


#셋째날. 아쿠아플라넷 제주

오늘은 아이가 원하는 스케줄로 아쿠아리움에 왔다. 서울에도 널리고 널린 아쿠아리움을 굳이 왜 오나 싶었으나, 아쿠아 판타지아의 초반 15분 동안의 공연은 서커스를 방불케 했고, 나름 만족스러웠다. 


#중문색달해수욕장

폭염 속에서 극성수기 제주여행을 하려니 '동남아나 갈걸, 서울 시내 호캉스를 갈걸, 차라리 집에 있을걸.' 하는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아이가 서핑하는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강습받는 아이들 중 제일 어린데, 오늘은 날도 흐리고 파도도 거센데 근성있게  파도를 타는 모습에 감동 또 감동.

어쩜 그렇게 씩씩하냐고 폭풍칭찬을 해 주었더니 배시시 웃으며 속삭인다. "아빠가 끝까지 하면 장난감 사 준댔어." 에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남편은 나에게도 끈질기게 서핑을 권했지만 어림없지. 내가 남편의 강권으로 스키는 엉겁결에 배웠지만 서핑까지 할까 보냐. 애초에 나는 한여름 바닷가에서는 농부같은 차림으로 튜브에 매달려 둥둥 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대한민국 40대 직장인이란 말이다.


#근고기

한 때는 맛집이라면 버스와 지하철을 두세번씩 갈아타고 찾아가는 열정이 있었건만. 한 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음식맛이란 무얼 먹느냐보다 언제, 누구와 먹느냐에 더 좌우된다는 걸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에 왔으니 흑돼지는 먹어줘야 되지 않냐는 나의 말에 남편이 검색해서 수요미식회 맛집으로 인도했다.


저녁 8시 반쯤 가서 번호표 받고 한 시간 기다려서 먹은 근고기는 분명 맛있었지만 그렇게 애써서 먹을 것까지 있나 싶더라. 오는 길에 남편과 아이가 속닥거리길래 들어보니

"난 지난 번 돈까스랑 스파게티 또 먹고 싶어."

"그치? 아빠도 그거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돼지고기를 너무 먹고 싶어해서 어쩔 수 없었어. 엄마한테 한 번 양보하자." 이런다. 그리고 숙소에 와서 사이좋게 컵라면을 끓여 먹은 이 두 남정네들 어쩔...


#넷째 날. 제주승마공원

남편이 말 타러 가자 했을 때 이 더위에 무슨 승마냐고 한 소리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따라나섰더니 웬걸... 말 등에 앉아 숲길을 산책하니 하나도 안 덥고, 평화롭고, 새소리도 들리고, 아이도 즐거워하고... 암튼 다 좋았다. 아무래도 남편이 아니라 내가 문제인가보다.


#피규어뮤지엄 제주


#오프로드체험장

이번에야말로 덥고 고생스럽겠지 했는데 햇빛이 좀 있었지만 바람 시원하게 불고, 엄청 스릴있고 재밌었다.

남편투어 의외로 성공적인걸?


#믿거나말거나박물관

여기를 끝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고, 저녁으로 결국 (그놈의) KFC를 먹고 제주공항으로 갔다. 남편투어 끝!


* 2019년 여름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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