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MBTI를 크게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몇 번의 검사를 받으면서 계속 ENTJ가 나왔고 저도 스스로 그런 줄 알았는데, 작년에 자신을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실제 유형은 ENFJ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내가 감정형 인간인 것이 싫어서, 감정을 꾹꾹 눌러담으면서 강해지려고 애쓰다 보니 ENTJ를 동경하게 되었고, 어느 틈에 그 유형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가 다를 때에는 검사결과의 오류가 있을 수 있어요.
꼭 그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MBTI의 각 유형은 나이가 들수록 통합됩니다. 직관이 강한 유형도 나중에는 감각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고 해요. 그러므로 내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에 너무 한정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여전히 MBTI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구인데요. 특히 저에게는 S(감각형)와 N(직관형)의 구분이 그러했어요. 혹시 '내 아이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신가요? 그럼 이 부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감각형과 직관형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즉 쉽게 말해서 정보처리방식의 차이입니다. '감각형'은 오감을 통해 느낀 감각과 경험을 중시합니다. 사물의 세부적인 현상, 그리고 현재에 관심을 둡니다. 반면 '직관형'은 말 그대로 직관을 중시하며, 비유적, 추상적 사고를 하고 미래에 관심을 둡니다. 저는 전형적인 직관형, 아이는 감각형입니다.
제가 그 차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이의 독서교육이었어요. 저는 7세때 글자를 깨친 후부터 책을 너무 좋아해서 활자중독 수준으로 책을 읽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 나온 스토리를, 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지요.
아이와 제가 별개의 인격이라는 것을 (머리로만 알 뿐) 체감하지 못했던 초보엄마 시절, 저는 아이도 당연히 저를 닮아 책을 좋아하겠거니 했습니다. '나처럼 스스로 책의 바다에 빠지게 될 때까지 강요하지 말아야지' 하고 별다른 독서교육도 시키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책을 가까이 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어요. 6세 정도 되었을 때 초조해진 저는 뒤늦게 이리저리 육아서와 동영상을 뒤지다가 '요새 아이들은 우리때와 다르기 때문에 더 강한 자극에 노출되기 전에 책을 가까이 하게 해야 한다, 엄마가 책을 읽어주는 시간은 아이와 교감하는 기회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뿔싸, 내가 적기를 놓쳤구나! 후회와 반성을 하면서 그 때부터 잠자리 독서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이는 제가 읽어주는 책을 그렇게 재미있어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스토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끔은 "엄마, 얘(주인공)는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렇게 됐어?"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너무 뻔한 건데도요.
솔직히 '얘 혹시 지능이 떨어지는 건가?'라는 걱정이 들었어요. 그래서 또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직관형과 감각형의 차이를 듣게 되었고, 그제서야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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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이는 감각형이에요. 사물의 현상과 디테일에 강합니다. 얼마 전에 같이 동네를 걸어가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 저기 있던 보라색 꽃화분이 없어졌어."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길을 숱하게 걸으면서도 그 때까지 거기에 화분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요. 아이는 자기가 만나는 세상의 세부적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억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반대로 저는 보이는 세상 뒤에 있는 원리에 주로 관심이 있지요.
아이는 자발적으로 책을 읽거나 읽어달라고 조르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5세부터 8세까지 곤충도감, 공룡도감, 생물도감 등은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더군요. 저는 다 똑같아보이는 동물들의 세부적인 부분을 다 기억하고 그 차이점을 제게 설명해주기를 좋아했습니다(물론 저는 그 때마다 육신에서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붙잡아야만 했지요).
그런 아이에게 제가 주로 선택해서 읽어준 것은 창작동화였으니 흥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남이 만들어놓은 상상의 세계는 관심분야가 아니었거든요. 반면 제 기준에 도감은 책이 아니었어요. 저도 모르게 상상하고 유추하고 직관해서 느끼는 세계를 아이에게 강요했던 거에요.
어느 날 잠자리 독서 시간에 위인전을 읽어주는데 아이가 "엄마, 이건 실제 있었던 일이야?"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제서야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렇구나. 아이는 정말로 실제, 현상, 현실에 관심이 있구나.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놀라웠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가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읽도록 내버려둡니다. 그리고 흥미 없는 창작동화 전집은 치워버리고, 그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아쿠아리움의 연간회원권을 끊어서 문턱이 닳도록 데리고 다녔습니다. 매번 갈 때마다 코브라 우리 앞에서 말을 걸면서 "엄마, 오늘은 코브라가 후드를 펼쳤어."하고 신나합니다. 저는 멀치감치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가끔 대꾸해주면서 슬쩍 스마트폰으로 코지 미스터리 소설 같은 걸 읽어요. 둘 다 행복한 시간이지요.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직관형은 뭔가를 깨달을 때 A -> B -> C -> D 의 단계를 차근히 밟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딱 보면 D인데?'하고 A에서 D로 바로 튀지요. 중간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합니다. 감각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근차근 자신의 오감으로 확인하고 하나씩 스텝을 밟아야 해요. 그래서 직관형이 보기에 감각형이 다소 이해력이 떨어지고 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감각형은 차근히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해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지요.
아이가 공부를 할 때 '아니 왜 이걸 이해를 못 해?' 하는 순간이 많이 있었는데, 이 차이를 깨닫고는 답답한 마음을 많이 내려놨어요. 저는 정말 전형적인 직관형이라서 감각형들이 어떻게 사고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우고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요. 그리고 절대 제가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
PS. 남편도 전형적인 S형인데요. 얼마 전에 대화를 하다가 남편이 저의 생각을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는 제 생각을 한 번도 설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네요. ^^
MBTI의 다른 유형은 다를 때 서로 보완이 되지만, S와 N은 가급적 같은 것이 좋다고 해요. 다르면 서로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어서 갈등이 많다네요.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이들면서 감각형도 통찰이 생기고, 직관형도 오감을 쓰게 되니까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으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