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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Jan 04. 2021

한 마디는 할 수 있잖아 - 남편과의 스몰 대화

스몰리스트의 삶


"남편과 대화를 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나는 상담 선생님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선생님, 남편과 대화가 되면 제가 여기를 왜 오겠어요.'


남편과 나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종교, 가치관, 취향, 취미에 식성까지도. 일 년이 넘는 연애 기간 동안 그 차이가 문제 되지 않았던 것은 일차적으로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겠지만, 남편이 내 요구라면 뭐든지 들어주는 예스맨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예스맨은 결혼식장의 문을 나서고 나서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연애시절 슈퍼 갑의 지위를 과시했던 나는 결혼생활이 시작됨과 동시에 남편과 동등한 위치로 내려왔고, 우리가 의견 차이를 보이는 일의 결과는 그때 그때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내 말대로 하던가, 네 말대로 하던가. 중간은 없어.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고, 급기야 나는 을의 위치로 내려서게 되었다. 아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때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열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침묵의 냉전을 펼쳤고, 집안 공기는 싸늘해졌다. 나는 아이가 그 분위기 속에서 숨죽이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되어, 대부분의 경우 지고 들어갔다(물론 남편이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참다 참다 터져서 상담실에 찾아갔는데 고작 들은 말이 "대화를 해 보세요."라니.


게다가 나는 애초부터 누군가와의 견해 차이를 말로 조율하는 데 서투르다고. 그게 싫어서 혼자 하는 일을 택할 정도인걸. 사실을 설명하는 말하기, 내 의견을 주장하는 말하기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너의 차이를 인정하고,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아마도 내 속에 '이것이 옳아.'라는 신념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어떡해. 더 이상 일방적으로 맞춰주기도 싫고,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으면 결국 대화밖에 방법이 없는걸. 그리고 나서 아이 메시지니 비폭력대화를 공부해 보았지만 그때뿐, 크게 바뀌는 것 같지도 않고 '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만 심해질 무렵 스몰 스텝*을 알게 되었다. 그래, 이거구나. 모든 일은 잘게 잘게 쪼개면 부담스럽지 않은 단위가 있지.  


먼저 내 감정이나 상태를 세 글자로 말하는 연습을 해 보았다. 서운해, 속상해, 힘들어. 요건 쉽구나.

그다음에는 내 의견을 한 문장으로. '나는 **했으면 좋겠어.' 그 다음은 '당신은 어때?'. 써놓고 보니 마치 영어회화 같다. 그래, 영어회화도 연습하는데 남편과의 대화 연습을 못할 게 무어냐. 아예 영어로 해버려? 하우 두유 필, 허니?  

 

세 번째로는 아이의 지도를 위해 배워둔 하브루타를 적용해서 질문하기. 남편이 내 기준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얼굴을 붉히며 "그게 말이 돼?"라고 받아치지 않고, (심호흡을 한 뒤) "왜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스몰 대화의 효과는? 예전에는 일단 대화할 생각만 하면 뒷골이 당기고 머릿속 혈관이 팽창되는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대화의 부담감이 덜하다. 한 마디 또는 한 문장만 시도하니 남편의 저항감도 덜하고.


그리고 질문의 효과는 상당히 컸다. 가끔 남편이 (내 기준으로는) "여보~ 코끼리 좀 냉장고에 넣어줘."와 같은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코끼리를 어떻게 냉장고에 넣어! 이 인간이!' 하고 속으로 뒷목 잡고 쓰러졌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 여보. 그런데 어떻게 넣지?" 하고 질문함으로써 공을 다시 남편에게 넘겨버린다. 이때 중요한 건 겉으로만 질문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이미 안된다고 판단 내리지 않는 것. 그렇게 하고 났더니 남편은 곰곰이 생각해 본 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라는 명을 거두었다. 캬캬  


아직까지 우리 부부는 대부분의 문제에서 부딪힌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이 참고 끝나는 일은 점점 줄어가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대화연습을 하다 보면 언젠간 남편과의 수다가 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몰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제임스 클리어 저)에서 습관형성을 위한 방법으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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