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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Jan 06. 2021

남편이란 외국인과 오늘의 한 문장

"넌 내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

남편과 나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크게 싸울 때가 있다. 주제는 늘 종교로 시작해서 가족으로 끝난다.

 

나는 약 15년 경력의, 나름대로 독실하다고 자부하는 크리스천. 남편은 분명히 연애를 시작할 때 교회를 다니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연애하는 동안 꼬박꼬박 같이 교회에 나갔음에도, 결혼 후 한 달만에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다'며 출석을 거부함으로써 '결혼 후 최단기간 안에 도망친 형제'로 우리 교회 기네스북에 당당히 기록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때의 마음고생이란!


하지만 종교라는 게 결국 본인 뚯에 달린 것인데 강요하기도 그렇고 해서 남편의 자유 영역이라고 인정하며 지내왔으나, 아이가 생기자 부딪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아이에게 가르치는 부모의 종교관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렇다. 역시 부부간에 덮어둔 모든 갈등은 아이로 인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일전에 남편이 아이에게 다양한 종교관을 접하게 해 준다고 하나님 말고 부처님한테도 기도하라고 했고, 아이는 쪼르르 내게 달려와 "부처님한테 기도해도 돼?"라고 묻는데, 내가 아무리 가정의 평화가 중요하기로서니 신앙의 양심상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결국 안 된다고 했다가 부부싸움으로 번졌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신앙인데 그것을 존중해달라.'라고 얘기했더니 대번에 받아친다. "너는 나를 존중해줬어? 너는 내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잖아."


What? 이봐요, 남편이란 이름의 외국인 씨. 그게 대체 무슨 뜻이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 내가 병원에 계신 시아버지 병문안을 가자고 말했는데, 남편이 다음에 가자고 했다.    

- 내가 지방에 계신 시할머니, 시외할머니를 찾아뵙자고 했는데, 남편이 다음에 가자고 했다.

- 내가 아이를 데리고 할아버지 묘에 참배드리러 가자고 했는데, 남편이 다음에 가자고 했다.

- 남편이 지방에 계신 시할머니를(시어머니도 아니고) 가까운 요양병원 모시고 오고 싶다고 해서, 나는 동의했다(결국 불발되었지만).

윗 보기 중에서 소중히 여기지 않는 행위는 무엇인가요? 그건 누가 한 건가요?


아니, 가족의 의미를 먼저 물었어야 했군요. 당신이 말하는 '내 가족'은 누구인가요? 거기에는 나도 포함되는 건가요? 


예전에 시아버지가 뭔가 언짢으신 게 있는지 나에게 불쑥 한 소리를 하신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아버님이 **를 하라고 하셨어.' 그것을 계기로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그걸 시어머니가 중재하시느라 시달리신 끝에 나에게 "말을 그렇게 전하면 어쩌니. 집안의 평화를 위해 현명하게 처신할 줄 알아야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그 '집안'에 저는 안 들어가는 건가요? 제 마음의 평화는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짐했지. '나 없이는 가족도 없다.'라고.


아하! 이제 알겠다. 이 문장은 관용구구나. '너는 내 가족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지.'는 '나 교회 싫어.'구나. 그걸 몰라서 여태 대화가 안 통했구나. 오늘도 하나 배워갑니다, 외국인 씨. 


ps. 남편이 아이에게 불교를 접하게 해주려는 이유는 아이를 키워주신 불교도 장모님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모님 딸내미한테 잘해주는 게 진짜 효도라고 생각하는뎁쇼. 



   

photo by quino-a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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